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로마서 1:9~10)
바울 사도는 복음을 신령한 은사, 직역을 하면 영적인 선물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거기에 쓰인 단어가 헬라어 ‘프뉴마티코스’입니다. 그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프뉴마, 성령’이라는 단어에서 파생이 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은사, 복음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그러한 신령한 은사를 이미 받은 자신에게서 나타나게 된 현상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신령한 은사, 즉 성령으로부터 시작이 된 영적인 선물을 받고 나니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프뉴마’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것 안에서 심령으로 섬긴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고,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말고 다른 종류의 잘못된 섬김도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영에 의한 섬김이 있는 반면에 육에 의한 섬김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렇게 육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가면 그러한 잘못된 섬김의 예가 잘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롬 10:2~3)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이 유대주의, 율법주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자기 의를 세우려는 섬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긴 것입니다. 섬김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체를 타자로 상정하고 있는 것인데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섬김은 주체가 자기 자신입니다. 그건 올바른 섬김이 아닙니다. 그걸 율법주의라고 하고 유대주의라고 하며 결국 그것은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자기 의 세우기 차원의 섬김과 대척점에 있는 섬김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심령으로 섬긴다는 것은 자기의 의가 철저히 내려 놓게 되고 자기가 부인이 되는 그런 섬김을 말합니다. 그게 아들의 복음(신령한 은사) 안에서의 하나님 섬김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막 생겨난 로마 교회가 혹 그러한 잘못된 하나님 섬김에 열심을 낼까봐 걱정스러워, 그들을 견고케 해 줄 요량으로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로마 교회로 한 달음에 달려가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열심을 부린다는 사람들이 전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것을 올바른 열심과 섬김으로 고쳐 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신령한 은사, 즉 하나님의 올바른 복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들에게서 그러한 가짜 섬김과 왜곡된 열심이 나오게 되는지에 관해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면서 평생을 하나님의 일에 헌신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여러 차례 목격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마지막이 보편적인 통일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로의 입성을 즐거워하며 평안하게 세상을 떠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을 그렇게 죽게 하신 하나님께 골이 난 상태에서 불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후자 쪽이 훨씬 많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이라는 생경한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죽음의 현실을 작게나마 수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성도들의 삶이라면 그러한 성도들의 죽음이 그렇게 불편하고 원망스러운 것일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죽음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자의 생경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사망이라고 하는 진짜 죽음에서 건져내셨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경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계신 곳에 가는 것이 불편한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 했는데 그분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분의 속성이나, 그분의 영광이나, 그분의 사랑이나 은혜나 긍휼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하늘의 삶인 영생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다는 증거이며 그러한 두려움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다고 사도 요한은 명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을 섬긴 사람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그러한 불편함으로 종영이 되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이 아무리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고, 평생을 헌신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교회에 다 갖다 바쳤다고 해도 그건 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더러운 죄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런 바보 같은 헌신과 투신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래서 복음이 ‘신령한 은사’인 것입니다. 신령한 은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열린 은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걸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 이니라."(고전2:12~14)
보다시피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에 의해서만 해석이 되어 지고 이해가 되어 집니다. 그 말은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의 하나님 섬김, 그리고 열심 있는 종교 행위는 전부 육적인 이해의 관점에서 나온 가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진짜 신령한 것을 받은 자들에게서는 육신의 것이 거두어 진다고 분명하게 선언을 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전9:11)
여기에서의 육신의 것은 단순히 헌신이나 헌금이나 봉사 등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히 성도의 소유를 털어 내는 정도가 아니라 성도의 육적 자아 전체를 털어내는 능력과 임무를 갖고 성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은 성도의 육적 자아의 죽음의 한 증상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무슨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 육적 자아를 많이 털린 사람이 기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할 때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기쁘게 하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에서 주어진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신령한 복음에 의해 육적 자아를 털리는 과정을 자기 부인이라 하고 그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곧 창세전 언약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이미 완료된 성도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확인해 가는 필연적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자기 부인인 것이며, 그것을 고난이라고 명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이 육적 자아를 예수 안에 넣어서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아 안에서, 그리고 자아 밖의 세상 속에서 처절하게 경험을 하며 한 발 한 발 육의 부인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건 곧 숨을 쉬는 상태에서 죽음을 맛본다는 말인데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녹록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낸다는 사람들조차도 그러한 육적 자아의 죽음이 왜 성도의 삶에 필요한 것인지에 관해 별로 고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육적 자아의 죽음의 현상들이 혹여 자신의 인생에 나타날라치면 득달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인생을 도와달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촉구합니다. 그건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을 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올바른 증상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열심까지 특심인 가짜들을 펼쳐서 보여 주시는 이유는, 예수 믿는 것의 시작과 과정과 결국이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근거하지 않은 인간의 열심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만한 것으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쌓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신령한 은사를 잘 공부하여, 과연 우리가 지금 제대로 된 열심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신령한 은사에 의해 견고케 되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의 세우기와 하나님의 의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의 세우기, 그 두 종류의 각기 다른 열심에 대한 경고의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