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4. 20.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고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겁한 자와 신실하지 못한 자와 가증한 자와 살인자와 음행하는 자와 마술쟁이와 우상 숭배자와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뿐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계21:5~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믿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당신의 생명수를 부으셔서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정말 그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을 것이고 그 소망은 우리를 절대 절망 속에 그냥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나에게 일어난 사건,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이런 어두운 상황,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캄캄한 인생의 터널 그런 것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가 믿고 있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그리고 우리가 입게 될 새로운 몸을 생각하십시오.

 

역사와 인생과 사건만을 바라보며 그 역사와 인생과 사건에 지배당하지 마시고 역사의 결말을 알고 있는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그 역사와 인생을 주도해 나가셔야 합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 백성들의 현장 실습장입니다. 그 하나님의 수업에서 우리는 잘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는 종이 칠 때 우리 아버지가 계신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이제 이곳 실습장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하고 의존하는 새로운 자들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있는 대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아직 이 모양인데도 너희는 이미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라고 확언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고후5:17~18)

 

우리는 이렇게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이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인식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혼돈 속에서 건져져서 새롭게 창조된 노아와 같은 자로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준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그저 순종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해서 그분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기를 애쓰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너는 죽고 하나님과 네 이웃을 목숨 바쳐 사랑하라’ 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목숨 바쳐 그거 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당장은 잘 안되더라도 결국은 우리가 그렇게 완성이 될 것이므로 열심히 노력해 보는 것입니다. 나와 의견이 조금 다르다고, 나를 모함했다고, 나의 진심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했다고,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해서 그 상대방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달려드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지 마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멋진 용서와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은 그런 우리를 가리켜 바보라고, 약해 빠진 자라고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비라는 것이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그 시대에 산꼭대기에다가 배를 지었습니다. 그것도 120년 동안, 그건 정말 세상적으로 볼 때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그 짓을 한 것입니다. 그 노아의 반대편 사람들은 용사가 되고, 유명한 자가 되기 위해, 다른 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보 같은 짓을 한 노아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가 무엇이며 이 역사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분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통해 배우고 오라고 하신 그것들만 열심히 경험하고 익히고 배우다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당해주고, 죽어주는 것이 패배자의 모습처럼 보이고 구차한 자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게 진짜 승리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양털처럼 희게 만드신 방법은 십자가에서 그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들이 저지르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십시오.’ 죄는 용서를 통해서만 소멸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아십니까? 누가 어떤 상대방에게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상대방이 자기에게 해를 끼친 자를 용서할 때 그 커다란 죄가 소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을 좇아 살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세상의 죄를 용서와 사랑으로 소멸하는 자로 이 땅을 살다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용서해 주고 사랑해 준다고 해서 그 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죄가 진짜로 소멸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처분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역할만 잘해 내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죄를 소멸하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 우리는 그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기적이어서 어떤 분쟁이나 다툼이 있을 때 항상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분쟁과 다툼 속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누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졌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억울해서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혹시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로 가게 되고 종국에는 자신의 모난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이 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유익입니다.

 

가해자들이 기도하는 것 보셨습니까? 그런 사람은 절대 기도의 자리, 성숙의 자리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해자인지 아니면 당해주는 자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험지가 바로 ‘나는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참회와 회개를 하는 자리로 내려갔는가? 그 일이 나의 신앙 성숙에 도움이 되었는가?’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역사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압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교회를 가리켜 말씀의 해석학적 공동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