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리고 성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이스라엘이 손 하나 까딱했습니까? 이스라엘은 망치질 한 번 안하고 그 철옹성 여리고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판단이 되는 것도, 그 판단을 유보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존재 이유이기에 그 엄청난 여리고를 마냥 돌기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이스라엘, 즉 교회의 전쟁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나’를 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거기에 여리고는 그저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전쟁에서 발생을 합니다. 여리고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아이 성에서 이스라엘이 대패를 하게 됩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어떻게 하는지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수7:7)
홍해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투정을 합니다. 이렇게 인간들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아이 성에서 패배를 한 것입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수7:1,11)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대패를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리고에서 취한 전리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수6:18~19)
여기에서 ‘바친 물건’ 혹은 ‘바칠 물건’이라고 번역이 된 ‘헤렘’이라는 히브리어는 ‘완전히 멸하기로 정해진 것, 완전히 바쳐지기로 정해진 것’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멸해져야 할 것이 조금 남겨져서 아간이라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하나님께 바쳐져서 진멸되야 할 것과 그 물건을 바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시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수7:12)
그러니까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소유나 힘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이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진멸되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고 수긍하여 하나님 앞에 완전히 비워져서 철저한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전쟁에서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망에 처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가치 챙기기나 영광 챙기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게 되면 그들은 아이 성 앞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불순종의 죄인을 불살라 버리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수7:15)
그래서 아간은 저주의 불에 타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아간이 전리품을 숨길 때의 모습이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7:21)
여기에서 ‘보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 ‘라아’는 창세기 3장에서 ‘보암직도 하고’의 그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주 이스라엘의 범죄를 아담의 범죄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호6:7)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저주받을 인간과 그를 은혜로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만 점철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간은 바로 ‘나’인 것입니다. 아담이 그러했듯이 아간 안에 들어 있는 ‘나’도 아간처럼 그렇게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체적인 구원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잘 보면 아간이 뽑히는 과정을 성경이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수7:16~18)
저주의 불에 타 죽어야 할 자가 뽑히고 뽑히는데 하필 유다 지파에서 뽑힙니다. 그리고 그가 아골 골짝에서 죽은 후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여호수아 7장 1절로 가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수7:1)
아간 하나가 범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를 하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개별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는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 한 사람 아간이 범죄를 했는데 하나님은 그를 대표로 한 모든 집단을 다 저주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걸 로마서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한 사람 아간이 범죄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다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간이라는 사람이 죽자 이스라엘이 저주에서 풀려 승리를 하게 됩니다. 물론 아간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뽑히고 뽑힌,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자가 죽었는데 이스라엘이 살아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 중에서 뽑히고, 뽑히고, 또 뽑힌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대신 유다 지파에서 뽑히고 뽑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 아간이 되셔서 대신 죽어 주시는 방법으로 죽어야 할 아간들을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구원의 이야기가 아이 성 전투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7:25~26)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드려져야 하는 자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기의 자존심과 가치와 영광을 챙기려 하는 그 상태가 이렇게 돌에 맞아 죽고 불에 살라져야 할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로 내려 가셔서 우리에게 쏟아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아간이 맞아죽은 그 아골 골짜기를 성경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사65:10)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5)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중에서 죄인으로 뽑히고 뽑힌 자가 죽은 곳이 소망의 문이 됩니까? 이러한 구절들은 여호수아서에서 아간의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구절들입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이야기를 통하여 죄의 실체와 그 죄에 떨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저주와 그 저주가 해결되는 방법까지 아울러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아간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보십시오. 아간이 죽고 아골 골짜기가 생기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는데 완벽한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라는 것도 잊지 않으시고 설명을 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이스라엘이 자기를 광야로 따르던 아이 모든 거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그 날에 아이 사람의 전부가 죽었으니 남녀가 일만 이천이라.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수8:18,24~26)
여호수아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승리를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현장에서 우리가 많이 보던 장면이 연출이 됩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수8:28~31)
사탄의 나라를 상징하는 아이 성의 왕이 나무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 시체가 해질 때에 나무에서 내려집니다. 그리고는 그 시체가 돌무덤에 갇힙니다. 예수님도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왜 나무에 달리셨습니까?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2~23)
예수님은 저주받은 죄인 중의 괴수가 되셔서 나무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나라 왕으로 상징이 되는 아이 성의 왕도 나무에 달리고 돌무덤에 갇힙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사탄의 나라 왕과 같은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탄나라 왕이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아간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한 번 더 재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간과 같이 아이 성의 왕도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돌무덤은 아직도 그들을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돌무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흘 뒤에 열렸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불순종을 은혜로 덮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실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반복적이며 점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대표의 원리와 은혜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는 로마서 5장 19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나, 율법주의, 인본주의는 자존심이 상해서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약속의 땅에서, 우리는 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처절하게 삶으로 배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간의 범죄가 우리의 삶 속에서 들켜 지기도 하고, 아이 왕의 행사가 우리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난 이렇게 돌에 맞고 나무에 매달리고 불에 타 죽어야 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로 날 덮으셨다’는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자존심과 자만감이 해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성경이 자기부인이라 하는 것이며 그것을 또한 성도의 영적 전쟁이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은혜의 복음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노력과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가 오늘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삿1:7)
가나안 왕 아도니 베섹이 그의 행한 대로 갚음을 받아 손발의 엄지가 끊긴 채로 죽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은 아도니 베섹의 상황이 되면 ‘나는 그런 악한 일을 행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악행을 덮으신다’라고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 베섹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나의 행한 대로 내가 갚음을 받는구나’하고 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종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이것이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결국인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3~14)
우리 성도는 믿음이라는 배짱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나안 정복 전쟁이며 사사기 전체에서 기술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사사기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더욱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지만, 동시에 은혜로 덮으시는 복음의 현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하고, 내 영광과 자존심을 움켜쥐려 하며, 결국 아간처럼 감춰둔 죄를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단지 죄의 경각심만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보여줍니다. 유다 지파에서 뽑히고, 뽑히고, 뽑혀 결국 진멸당한 아간처럼, 예수님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셔서 죄인 중의 괴수 자리에 서셨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죄인 취급을 받으시고, 대신 저주를 뒤집어쓰신 것입니다. “복음은 은혜이며, 이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세상의 방식은 ‘네가 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정의를 말하지만, 복음은 ‘네가 한 대로 갚음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대신 갚았다’는 은혜를 말합니다. 순종은 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삶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죄인인가를 알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크고 단단하게 우리의 삶을 붙드는 복음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