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장 2~3절)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속에는 아벨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삶을 살았는지가 나옵니다. 먼저 아벨의 이름처럼 성경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분이 계십니다.
아벨의 모습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열심히 드리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는 의인이신 주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드리는 제사의 행위와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나 인간이 드리는 어떤 제물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어떤 것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자기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설사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안 받는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내가 나의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자 심히 불쾌해합니다. 그리고 안색까지 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하는 자들과 세상의 것들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 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으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의 후손을 대표하는 자의 이름이 ‘아벨’ ‘아무것도 아닌 자’인 것이고 그가 세상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4)
아벨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죽음은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드린 제사가 온전한 제사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보겠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4:25)
여기서 ‘대신에’는 히브리어로 ‘두다, 임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의 그림자로 왔던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셋'은 죽은 여인의 후손으로 재등장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십자가 삶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세상의 힘의 원리에 맞아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바로 그 삶이 ‘셋’으로 부활하는 삶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벨을 선지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이렇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벨과 같이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살 때, 부활한다고 합니다. 맞아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 탄생했습니다.
세상에 의해 맞아 죽은 자들의 삶을 밖에서 보면 사랑이요, 인내요, 온유요, 절제요, 용서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탄생하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사람 ‘셋’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활을 기다린다면, 죽어야 합니다. 옛사람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