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들이 품고 있는 두 번째 살인의 동인이 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왜 화를 내느냐?’라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인자의 삶을 살게 된 죄인들에게서 나오는 대표적인 감정이 분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를 말합니다.
거룩한 분노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시면서 유대인들의 외식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죄를 보고 분노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죄가 발견될 때 분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로 죄를 제거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거룩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내는 분노는 그것 자체가 살인의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비밀 회담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들의 회의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창49:6)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유익을 위해 뿜어내는 분노와 혈기는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없애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오염된 육체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사용하여 살인의 도구로 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이 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그 분노를 해 질 때까지 품고 있지는 말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
우리는 분노를 참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분을 내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분을 내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분을 낼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청준 선생의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에 보면, 일찍 남편을 여의고 사랑하는 아이마저 유괴범에게 살해당한 한 여인이 자기 아이를 살해한 유괴범을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이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장면으로 그 소설은 끝이 납니다.
그 여인은 일차적으로 자기 아이를 살해한 유괴범에게 분노한 것이지만, 결국 그 분노의 끝자락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분노는 그 대상이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결국 그 분노의 끝으로 가보면 인간의 분노는 항상 하나님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살해한 가해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그 가해자들이 당해야 할 고통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 세상에서 질병으로 가난으로 전쟁으로 천재지변으로 조금씩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전부 인간들의 죄로 인한 죄의 부산물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그러한 죄의 열매들이 자신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될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한 발 한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들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은 그러한 죄의 열매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보여 지면 자신들은 누군가로부터 가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분노는 하나님을 살해한 가해자인 우리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이신 하나님께서 가해자들의 죄를 향해 발하시는 것이 분노입니다. 여전히 그러한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 분노에 대응해서 자기들도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분노 속에서 해방된 무리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보며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아들에게 그 모든 분노를 다 쏟아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 아들 안에 있는 자들의 죄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분노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혹여 상대방이, 자신에게 분노를 일으킬 만한 행동을 해도 이내 자제를 하고 자신을 향한 분노를 거두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분노케 하는 모든 상황과 사건들과 이웃들을 자신의 영적 성숙에 유효적절하게 사용할지언정 그것을 살인에 사용하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이렇게 질투와 시기와 분노로 야기되는 살인은 모든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죄의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유익과 명예를 위해서 언제든지 자기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 욕을 해대는 살인을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언제든지 형제에게 노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언제든지 형제에게 바보라 부르는 자들이 죄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분노에서 구출되었다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시기와 질투와 분노의 살인을 하고 있다면 과연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 것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 추구해야 할 것은 내가 여전히 시기하는 자, 질투하는 자, 분노하는 자, 살인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사랑하는 자, 용서하는 자, 온유한 자로 지어져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