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의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벨은 처음 태어난 아기 양과 양의 기름을 바쳤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매우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왜 안색이 변하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들에 나가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창세기 4장 3~8절)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에덴에서 추방된 죄의 열매로 첫 번째 기록된 것이 살인입니다. 성경이 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살인이 어떠한 죄이며 어떠한 근원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설명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살인의 행위를 몰아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된 범죄가 바로 살인죄입니다. 십계명의 6계명부터 10계 까지는 ‘무엇 무엇은 하지 말라’라는 경고입니다. 그 경고의 계명 가운데 가장 첫 번째 것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성경은 살인에 대해 아주 무섭게 경고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성경을 통해 무섭게 경고하는 살인죄가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형제를 향해 노하는 것, 형제에게 욕하는 것,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업신여기는 것 모두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인과 벌이 똑같습니다.
사도 요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살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살인자들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살인자 가인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자들은 살인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은혜의 자리를 떠난 죄인들은 이제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스스로 보호해야 하므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남을 밟는 것이 그들의 삶의 원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삶 전체를 ‘살인자의 삶’ ‘가인의 길에 행하는 삶’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그 살인자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며 그들은 이 땅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정확한 예화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살인자들의 삶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징후, 즉 살인을 일으키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살인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징후의 첫 번째가 '시기와 질투'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여자들의 애교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는 그 자체가 살인의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한 이유도 질투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도 역시 질투 때문입니다. 질투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왜곡시키는 가장 무서운 감정이 바로 질투심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질투심을 갖지 않습니다.
질투심은 어떤 면에서건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갖는 감정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망상 속에 사로잡혀 있는 가인들은 다른 이들에게서 자기보다 나은 모습이 보일 때 그를 제거하고 싶어집니다. 그게 바로 살인의 동인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러한 가인이 없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올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바로 벤치마킹의 이성적 자세입니다. 벤치마킹은 경쟁업체의 장점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배워서 쉽게 아이디어를 얻어 그 경쟁업체를 따라잡는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도는 그 사람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도 생활을 분석하고 배워서 자신도 기도 생활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내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지 벤치마킹해서 나의 영적 생활에 유익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러한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한 벤치마킹으로 자신의 영적 유익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 상대방을 말로 행동으로 몰아붙여서 죽여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질투의 정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 하셨을 때 도대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은 나의 삶을 기뻐 받지 않으시는지 그리고 저 아벨의 삶은 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인지 고민하고 분석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죽여 버리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아벨만 없으면 자기가 최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질투이며 살인입니다. 세상은 그러한 질투로 점철되어 있으며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인 아벨들은 계속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가인들의 죄가 폭로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