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의 이름은 그두라이다. 그와 아브라함 사이에서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가 태어났다.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다. 드단의 자손에게서 앗수르 사람과 르두시 사람과 르움미 사람이 갈라져 나왔다.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인데,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재산을 모두 이삭에게 물려 주고,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에게도 한 몫씩 나누어 주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첩들에게서 얻은 아들들을 동쪽 곧 동방 땅으로 보내어서, 자기 아들 이삭과 떨어져서 살게 하였다. 아브라함이 누린 햇수는 모두 백일흔다섯 해이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굴에 안장하였다. 그 굴은 마므레 근처,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다. 그 밭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다. 바로 그 곳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와 합장되었다.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그 때에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창25:1~11)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25장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정한 수(壽)를 다 채우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기꺼이 하나님께로 떠난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그렇게 오매불망 바라던 본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3~16)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그 본향을 바라보며 이 땅을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이방인으로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는 날까지 가나안 땅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고 자기를 위하여 그가 뿌리를 내릴 그 어떤 땅과 건물도 마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아내의 무덤자리로 사놓은 막벨라 굴에 조용히 묻힙니다. 그는 결국 그토록 바라던 소망의 나라, 본향으로, 진짜 고향으로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선진들을 자주 고향에서 내 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숨을 거두었고 야곱도 20년 이상을 고향을 떠나 객지를 방황해야 했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에 고향을 떠나 애굽에서 숨을 거두었고 모세는 그의 인생 120년 동안 한 번도 그 조상의 고향인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습니까? 어린 나이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고향을 그리며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며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느헤미야, 에스라, 에스더, 모르드개 모두 그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향을 떠난 이민자만큼 나그네 인생, 이방인의 인생, 우거하는 자의 인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난 이들보다 마음의 공허와 영혼의 갈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 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참 본향에 대한 열정과 소망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자기들의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소망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잘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신앙의 선진들은 모두 다 타향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재산도 권력도 고향이 채워주는 참 만족과 포만감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인생에 우리의 인생을 투영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우리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고 그가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도피했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가 애굽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팔아먹을 때에도 우리는 그와 함께 사라를 팔았으며 그가 롯과 헤어지면서 롯에게 땅의 선취권을 내어줄 때에도 우리는 그 속에서 함께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도, 그가 온 가족에게 할례를 행할 때에도, 그가 하나님과 그의 사자들을 대접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도 우리는 함께 있었으며 그가 자기 아내 사라를 먼저 보내고 통곡을 할 때에도 우리는 그와 함께 통곡을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모든 생애는 바로 우리의 신앙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의 죽음 앞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도 역시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죽는다는 말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합니다. 그 말은 인간이 수명이 한정되어 있음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인생의 날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도 이 땅에서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을 통과하게 되었을 때에 돌아갈 본향이 있느냐 없느냐 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이 시간의 밖에, 오는 세대가 존재함을 반복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사도 바울이 ‘현재’ 즉 ‘현세대’와 ‘장차 올 세대’가 존재함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정확한 시대 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오는 세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그는 14년 전에 낙원에 올라갔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온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게 될 하나님 나라를 본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당당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현세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오는 세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현 세대가 고난으로 점철된 세대라면 오는 세대는 영광으로 가득 찬 세대이다.’
그렇게 그 나라를 이미 본 바울이 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3:20~21)
그런데 그 나라는 이미 창세전에 완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25:34)
그 나라가 창세로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창세로부터’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 창조될 때 이미 준비되어 있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는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시작된 이 ‘현세’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현세는 각자의 죽음으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현세라는 시간을 벗어나게 될 때 우리를 기다리는 영원이라는 새 세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본향을 향한 그리움이며 본향을 향한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소망이 분명히 있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건대’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단순히 ‘상상해 보건대, 추측해 보건대’라는 의미가 아니라 ‘배우고 경험하고 익혀서 내린 결론인데’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그건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은 ‘그 수가 높고 나이가 많아’죽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수가 높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사베아’는 단순히 장수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단어는 180세를 산 이삭에게도 쓰였고 70세를 산 다윗에게도 쓰였으며 140세를 산 욥에게도 쓰였고 130세를 산 여호야다 제사장에게도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는 단순히 오래 살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단어는 ‘나이에 만족해서’라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으므로 만족한, 다시 말해 완전한 삶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누가 보기에도 완전하고 완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삶에는 실수와 질곡이 참 많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알리는 창세기 25장에 ‘다시 아내를 맞이하였다’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언약 백성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갈을 첩으로 맞이했던 그와 같은 일을 또다시 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실수투성이였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했던 존재였음이 그 단어 하나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사람됨이나 그의 인격의 성숙 등과는 상관없이 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삶이었기에 그의 죽음을 ‘만족한 죽음, 완전한 죽음’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그게 소망이 있는 자들의 안전함입니다. 실수 속에서도, 넘어짐 속에서도 본향을 향한 그리움과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삶, 그것이 만족한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우리의 보배로 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리워하십시오. 꿈에라도 그리워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