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재미없는 나이가 어디 있으랴. 인생은 어느 시기건 그에 알맞은,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을 충분히 느끼며 산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천하에는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나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만드셨느니라" (전도서 3:1)
뭐가 그리 억울하십니까? 아침이면 태양을 볼 수 있고, 저녁이면 별을 볼 수 있고, 잠이들면 다음날 아침 깨어날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깨달은 것들
죽음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기며 기적이라는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기적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자에게만 허락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겸허해야 하며, 절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하며, 더러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 (누가복음 18:27)
외롭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낭비된 인생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낭비하는 시간이란 외롭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뿐입니다. 외로워서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기애가 지나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증거는 주변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자기 정서를 표현하며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면 외로움은 줄어들 것입니다. 사랑도 능력입니다.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길러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 삶에 관심을 가져 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나이 들어 가끔 혼자 있을 때 까닭 없이 눈물이 나곤 합니다. 그것은 나이 먹은 이들이 느끼는 온갖 감정이 눈물 한 방울로 솟아나는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감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다면 푸념만 늘어놓지 말고 생각나는 사람을 찾아 가거나, 전화나 문자 한 통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리운 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때로 위안을 얻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짐을 지십시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 (갈라디아서 6:2)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사는 비결
멀리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항상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의 가정에 사랑을 가져오십시오. 이곳이야말로 우리 서로를 위한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가족을 이어 주는 끈은 혈통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대한 존중과 만족입니다.
노후를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자식과의 보이지 않는 감정싸움입니다. 자녀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살피고, 자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감정적 피곤에 젖어 살아 갑니다.
자식 또한 부모니까 하는 수 없이, 남들 눈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기희생을 감수합니다. 그런 억지 정성과 사랑 없는 행위가 부모 자식을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부모 자식이 서로 거절을 흔쾌히 받아들여 마음에 앙금이 없는 것이야말로 가족 모두가 행복해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아파도 당당하게 아파라
어느 분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 당뇨병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게으른 성격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내게 평생을 통해서 먹고 마시는 일에 지나치지 말고 절제하라고 숙제를 내주신 것이다."
아프지 않고 장수할 수 있다면 정말 보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하다고, 한두 가지 병을 앓는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 새롭게 맞이한 인생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이 들어 아프고 병을 앓는 것은 자연이 이치입니다. 여러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라도 그 삶이 다할 때까지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과 더불어 당당한 자세로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
노년에 공부가 필요한 까닭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피리로 음악 한 소절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오?"
누군가 이렇게 묻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나이가 들면 순수하게 즐기면서, 놀듯이, 오로지 공부만을 위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경쟁을 하거나 누구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기에 배움의 뿌듯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나이 들어서 공부는 뭣에 쓰려 하느냐,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들 합니다. 톨스토이는 노년에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70세 할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평생 동안 노동한 대가로 허리가 꼬부라지고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지만 할머니는 하루도 결석하지 않습니다. 노트에 자기 이름 석 자, 남편 이름 석 자를 쓰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기쁨과 뿌듯함이 가득합니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한 전진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나이가 들어 몸은 늙어도 생각은 녹슬지 않습니다. 체력에 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각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은퇴 뒤 넉넉해진 시간이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으며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시편 92:12-14)
가장 안전한 길이란 없다
안전이란 십중팔구 미신입니다. 자연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길게 보자면 위험을 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맞서려고 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삶이란, '위험을 무릅쓴 모험일 뿐'입니다.
나이가 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보입니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고 젊은 날을 아쉬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깨달음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젊은 날에 알았다면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야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청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청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가장 큰 미덕은 모른다는 거, 그리고 미래가 있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그 모른다는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이 듦'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알고 보니 나 혼자 이룬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그때 그 일들이 내가 잘해서 성사되고, 내가 잘못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시간의 강물을 따라 하나하나 드러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무모해도 좋습니다. 엎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패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처한 현실이 결말이 아님을,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꿈을 밀고 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입니다. 우리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스스로 믿는 만큼 성공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노년의 사람들은 힘든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도 그들 나름대로 또 다른 시대적 고통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잡고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시간의 힘이 우리가 무의식중에 바라는 곳으로 천천히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9)
무조건 최선이 다가 아니다
실수와 불행은 자기 능력보다 120% 해내려는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는 80%의 능력 발휘를 목표로 세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120%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절망감, 80% 이상 해냈을 때의 뿌듯함, 그 다음에 이어질 자신감은 어느 선택에서 커질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경쟁에만 힘을 쏟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면 그뿐입니다. 그러면 수 많은 이야기, 수 많은 일들이 가지치기를 합니다. 지금 건강 때문에 산 높은 곳까지 오르지 못한다면 그 산 봉우리에 올랐던 때의 이야기를 떠 올리십시오. 그것만으로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아파트나 사무실 창문 너머로 멀리 산봉우리를 바라만 봐도 좋지 않습니까? 산을 다리가 아니라 눈으로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산을 오르지는 못하지만 산을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자 아직 우리에게 허락된 즐거움인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자리에 눕는 날이 오게 되더라도 침대 위에서 산에 올랐던 동영상을 보며 머릿속으로 신나게 등반하는 삶을 사십시오.
"두 손에 들고 수고하며 바람을 쫓는 것보다 한 손에 평온함이 있는 것이 낫다." (전도서 4:6)
마음 속에는 지금도 철들지 않는 아이가 살고 있다
우리는 때론 3살이기도 하고, 5살이기도 하고, 37살이기도 하고, 50살이기도 합니다.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게 즐겁고, 또 현명한 어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것이 기쁩니다. 어떤 나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행복합니다.
인생의 시기마다 수많은 경험을 하며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열 살 때는 스무 살의 마음을 모르고, 30대에는 중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인간은 익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되었다고 10대의 발랄함을 버릴 필요가 있을까요? 마흔이 넘었다고 자식들에게 꼭 모범적인 아버지의 모습만 보여 줘야 할까요? 그리고 노년이 되었다고 날마다 점잖은 얼굴로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에는 장난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싶어 하는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아, 이렇게 하면 재미있을 거 같아'라는 생각을 나이 들었다고 억누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평상시에도 아이의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문제겠지만 가끔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느슨함은 꼭 필요합니다.
나이답게 사는 것이 언제나 엄숙하게 살라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건강합니다. 인생은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조율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어른인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3)
-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