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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은혜와 저주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4. 27.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노아를 천으로 덮은 모습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9장 19~23절)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방주에 넣어 심판에서 건져내신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언약을 주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인간들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언약이 체결되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노아의 만취사건입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그의 아들 중 이 노아의 벗은 모습을 보고 자기의 두 형제에게 고함으로 아비에게 저주를 받는 것으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 끝이 납니다.

 

도대체 이 이야기가 왜 노아의 홍수 사건의 결론 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심판 속에 꽃피는 은혜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노아의 홍수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일까요?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 전체를 요약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포도주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가 붙어 있습니다. 그전에도 계속 마셔왔던 포도주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노아가 이미 포도주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노아는 홍수 이전의 패역한 세대와 비슷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종 술취함을 패역한 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기록을 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17:27~28)

 

성경은 이렇게 패역한 세대의 특징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를 경험하고도 다시 이전의 패역한 세대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만취사건은 홍수 이전과 홍수 이후 세대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시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경고에도 절대 스스로 변화될 수 없이 타락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노아의 아들 함이 본 것입니다.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노아는 함과 함의 자식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아비가 자기 자식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다고 그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에게 종의 종이 될 것이라는 무서운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 결과 함의 후손인 가나안 사람들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시 노예로 살았고 역사적으로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사실 잘못은 자기가 저지른 것인데 왜 자기 자식을 저주합니까그 구절에서 함이 노아의 벗은 몸, 즉 아담의 벌거벗은 부끄러움과 같은 그 노아의 벌거벗은 죄를 보았다는 데에 쓰인 단어가 라아입니다.

 

그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히 쳐다보는 것을 넘어서 즐기며 조롱하며 보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어 고하매라는 단어는 노아의 아들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즐기며 보고 바로 이어서 형제들에게 그 아비의 부끄러움을 누설하고 설명해 준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 담고 있는 중심 메시지는 심판 속에 꽃 피는 은혜의 구원입니다. 모두가 다 심판의 홍수에 빠져 죽어야 하는데, 그중에서 몇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 속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뭔가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고 성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그들의 더러움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게 68절의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구절이 가진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그러한 덮어줌의 은혜라는 것을 노아와 세 아들이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재차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함과는 반대로 노아의 축복을 받은 셈과 야벳이 한 것은 아비의 부끄러운 죄를 뒷걸음질 쳐들어가 덮어준 것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은혜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함과 같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23절의 덮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덮어서 가리다라는 뜻도 있지만 죄를 가리워서 용서하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여기서 가리움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덮다입니다. 셈과 야벳은 바로 인간의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모델들이었던 것입니다그 덮어줌의 은혜는 창세기 초반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장 처음 나타난 곳이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무죄한 짐승의 가죽으로 덮어주신 치마 사건입니다벌거벗은 노아와 벌거벗은 아담, 이 둘은 모두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그 부끄러움을 그냥 덮어주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