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7. 2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창22:1~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세상의 상징인 갈대아 우르(바벨론)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소명) 그에게 믿음을 허락하시고(신앙) 그를 의롭다 칭하신 후에(칭의) 그를 진정 의로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성화, 영화)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안에는 구원의 서정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여정 전체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찾아오신 것도 하나님이요. 그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40여 년간의 방랑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마지막으로 그를 모리아 산에 세우시고 그를 시험하여 합격 판정을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성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로부터 이 천년 후에 당신이 직접 쪼개져 죽을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오셔서 아브라함에게 십자가의 내용을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움으로 기다리다가 보았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골고다 언덕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이삭은 자신이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처럼 자신을 불태워 죽일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릅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서 그와 연합되어 구원 얻게 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대를 향해 자신이 매달려 죽어야 할 형틀을 짊어지고 올라가 처참하게 찢겨 죽어야 하는 죄인들 대신에 그 자신이 죄가 되셔서 연약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죽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모리아 산의 이삭과 어린양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시 구약의 제사 제도로 연결이 되어 구체적 실습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죽어야 할 죄인 대신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대신 죽어 죄인의 죄를 대속하는 쪼개짐의 제사가 바로 구약의 성전 제사입니다.

 

죄인들의 구원은 바로 그러한 모양으로 주어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실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쪼개짐의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은 바로 죽어야 할 이삭 대신에 어린양이 죽어서 이삭을 살려낸 모리아 산, 즉 시온산에 지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리아 산 사건이 어떻게 시온산의 성전으로, 성전 제사로 이어지게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리아 산에 선 성전에서 드려지던 성전 제사도 원형은 아닙니다.

 

그 모리아 산에 선 성전 제사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의 본체이며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그 모형인 성전과 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그 모리아 산에 지어진 성전 앞에서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이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성전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이삭이 올라갔던 그 모리아 산,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이 되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진짜 성전, 진짜 제사, 진짜 모리아 산의 정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진짜 제사이며, 진짜 제물이며, 진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 자연스럽게 모형을 파괴하고 없애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약속의 자손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 어린양에 의해 죄와 사망에서 건져지게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 이레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이레는, 구원은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며 우리가 도달하려는 참 행복과 만족도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리아 산의 여호와 이레의 사건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결론이며 요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엉터리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을 만드신 것이 자신의 쪼개짐을 근거로 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것인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탄생과 완성도 그렇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이 되는 것임을 모리아 산 사건이 결론지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제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이게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나온 것일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음에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정말 이삭을 죽이실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 아들을 살려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40여년 이상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고 경험했습니다. 애굽왕 바로와 그랄 왕 아비멜렉까지도 벌벌 떨게 하시는 하나님, 도저히 불가능한 마른 막대기 같은 자기 부부에게서 새 생명을 탄생케 하신 하나님,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밀어 올리시는 하나님, 그렇게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된 아브라함은 이삭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 또한 실패치 않고 지켜질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마엘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직접 그 약속의 자손 이삭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장가도 못 간, 이삭이 죽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나긴 신앙의 여정 동안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과 신실하심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백세에 낳은 자식, 즉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참된 순종의 예배자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지며, 그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항복하는 자로 성숙 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모리아 산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항복과 순종의 자리, 다른 말로 예배의 자리를 향해 성숙 되어 가는 것이고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험에 멋지게 통과하여 영화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한 마디로 이 땅에서 예배의 삶을 배우고 참 예배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고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과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바로 그 예배의 삶을 배우고 익히며 경험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