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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와 루소의 우정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4. 29.

"스스로 대단히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퐁텐블로 숲 속을 걸어보라. 키 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숲 속에서 자신보다 더 큰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대한 힘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밀레의 말입니다. '만종'과 '이삭 줍는 여자들' 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 프랑수아 밀레는 자연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화가입니다. 그의 말은 그의 그림이 왜 누구에게나 편하고 쉽게 다가오는지 느끼게 합니다.

퐁텐블로 숲은 파리에서 남쪽으로 60km쯤 떨어진 곳이며, 이 숲을 끼고 서북쪽에 있는 바르비종은 '바르비종파' 가 생길 정도로 많은 프랑스 풍경 화가들이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밀레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지만, 처음부터 그의 그림이 세상에서 인정받았던 건 아닙니다. 밀레는 화려한 거실에 걸리는 그림이 아닌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밀레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친구인 철학자 루소와 아내뿐이었습니다.

밀레가 '접목을 하고 있는 농부'를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림 한 점 팔지 못한 밀레는 불기 없는 냉방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아내와 아이들은 며칠째 굶고 있었습니다. 그림을 완성한 밀레가 기쁜 얼굴로 가족들을 돌아보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핼쑥한 얼굴로 웃고 있었습니다.

밀레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목이 메었습니다. '어서 빨리 이 그림을 팔아서 양식을 구해와야지' 밀레가 주섬주섬 옷을 입는데 친구인 루소가 찾아왔습니다.
"여보게, 드디어 자네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났네."

밀레는 루소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습니다. 밀레는 그때까지 작품을 팔아본 적이 없는 무명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화랑에 자네의 그림을 소개했더니 적극적으로 구입하겠다고 나서더군. 이것 봐. 나더러 그림을 골라달라고 선금까지 맡기더라니까."

루소는 이렇게 말하며 밀레에게 300프랑을 건네주었습니다. 입에 풀칠할 길이 없어 막막하던 밀레에게 그 돈은 생명줄과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고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일로 밀레의 생활은 안정을 찾게 되었고, 보다 더 그림에 몰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 밀레의 작품은 차츰 화단의 호평을 받아 비싼 값에 팔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된 밀레는 친구 루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루소의 집 거실 벽에 몇 년 전 그가 남의 부탁이라면서 사간 '접목을 하고 있는 농부' 그림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밀레는 그제야 친구의 깊은 마음을 알고 그 고마움에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가난에 찌들려 있는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루소는 남의 이름을 빌려 그림을 사주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라디아서 6:2)

“스스로 대단히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퐁텐블로 숲 속을 걸어보라…”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 말은,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영혼의 자세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햇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그 숲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우리 위에 계신 위대한 창조주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밀레는 자연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그의 그림은 그 겸손과 경외로 채워졌습니다.

하지만 밀레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아야 했고, 심지어 아이들이 굶는 날에도 그는 캔버스 앞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현실은 매서웠고, 세상은 무명에 가까운 그의 그림을 쉬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 루소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의 이름을 빌려 밀레의 그림을 사 주었습니다. 돈이 필요한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그리고 그의 예술성을 믿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참된 우정을 보게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우리는 복음의 한 자락을 엿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죄로 말미암아 무명처럼, 가난하게 살아가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이름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그 생명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우리가 끝내 하나님의 작품임을 잊지 않도록 말입니다.

루소는 밀레에게 다가와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직접 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우리에게 오십니다. “누가 너를 위해 대신 값을 치렀다”고 하시지만, 그분이 직접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에 ‘루소’가 되어 주십시오. 지금 당장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없이 기도하며, 믿어주고,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 앞에서 무릎을 꿇던 밀레처럼, 주 앞에서 겸손히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우리 곁의 누군가가 쓰러지지 않도록, 조용히 그 짐을 함께 지는 참된 벗이 되어 주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