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늦은 점심 손님을 기다리며 국밥집 주인은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머리카락이 허연 할머니가 들어섰습니다. 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소년이 할머니 뒤로 손을 꼭 잡고 따라 들어왔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할머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뭇거렸습니다.
"저어.... 국밥 한 그릇에 얼마나 하는지...."
"4천원 받습니다."
할머니는 몸을 돌려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내 동전까지 헤아려보시더니 소년과 함께 자리에 가 앉았습니다.
"한 그릇만 주세요."
"예?"
"난 벌써 점심을 먹었다오."
"아, 예."
조금 뒤 주인은 김이 모락모락 나고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국밥 한 그릇과 깍두기 접시를 할머니와 소년의 가운데에 내려놓았습니다.
"아가야, 어서 많이 먹어라."
소년은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으려다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 정말 점심 먹었어?"
"그럼, 배불리 먹었으니 너나 어서 먹어라."
그제야 소년은 국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국밥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습니다. 마지막 국물 한 모금까지 후루룩 마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그들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오늘 참 운이 좋으십니다. 할머니는 오늘 우리 가게의 백 번째 손님이세요."
할머니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불안해하며 주인을 쳐다보았습니다.
"저희는 매일 백 번째 손님께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작은 복권을 하나 타신 셈이지요."
할머니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웬 횡재냐 하는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요?"
"아, 그럼요. 오늘은 그냥 가시고, 다음에 또 오십시오."
할머니는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로 환히 웃었습니다. 할머니와 소년을 배웅하는 주인은 그보다 더 밝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2개월 뒤, 할머니와 손자가 또 국밥집에 들렀습니다. 그들을 알아본 주인은 대뜸 "할머니는 참 복이 많으시군요." 하며 이번에도 백 번째 손님의 행운을 그들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어느 날, 주인이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다가 길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왔던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한참을 살핀 뒤에야 주인은 소년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국밥집에 손님이 들어올 적마다 돌멩이 하나씩을 땅에 그린 동그라미 안에 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점심 손님이 거의 끊어진 뒤에 돌멩이를 헤아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돌멩이는 50개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사흘째 내리 그 아이를 본 주인은 아내를 보내 무슨 까닭인지 넌지시 알아보게 했습니다. 한참 만에 돌아온 아내의 얼굴빛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내일 모레가 할머니 생신이래요. 할머니께 국밥을 대접해드리려고 언제쯤 오면 백 번째 손님이 될 수 있는지 셈하고 있대요."
이미 백 번째 손님에 대한 사연을 알고 있던 그의 아내가 일러주었습니다.
"이거 야단났군."
한나절 내내 "이거 야단났군."을 연발하던 아저씨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러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댔습니다.
"과장님이세요? 모레 점심시간에 저희 집에 오시라고요. 별일은 아니고요. 평소에 도와주셔서 점심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요. 친구분들하고 같이 오시면 더 좋습니다."
"여보게, 날세. 모레 점심시간에 우리 집에 오게. 무슨 날은 아니고, 그냥 점심 한 끼 같이 먹고 싶어서 그래. 직원들도 함께 와."
아저씨는 수첩을 뒤척이며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습니다. 국밥집 건너편에 소년이 할머니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국밥집에 손님이 들어갈 적마다 동그라미 속에 돌멩이 하나씩을 넣었습니다.
주인은 부인과 함께 가끔 창밖으로 그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여느 날과 달리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 소년이 서둘러 할머니의 손을 잡고 끌었습니다.
"할머니, 어서 일어나! 벌써 아흔아홉 번째 손님이 들어갔어. 다음이 백 번째란 말이야. 오늘은 내가 할머니께 사드리는 거야."
소년은 할머니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그래, 고맙다."
할머니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일어선 자리 옆에는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민들레 한 송이가 노랗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 날 진짜 백 번째 손님이 된 할머니는 또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대접받았습니다. 식당 안을 가득 메운 손님들은 물론 아무런 영문도 몰랐습니다.
"여보, 저 아이에게도 한 그릇 내놓읍시다."
아내의 귓속말에 주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쉿, 그런 말 말아요. 쟤는 오늘 안 먹어도 배가 부르는 법을 배우는 거요."
그러면서 턱 끝으로 할머니와 아이 쪽을 가리켰습니다. 할머니는 천연덕스럽게 혼자서 국밥을 후룩후룩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길은 할머니의 숟가락을 따라 국밥 그릇에서 입으로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러다 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습니다.
"너 정말 배 안 고파? 좀 남겨줄까?"
"난 안 먹어. 정말 배불러. 이것 봐."
아이는 짐짓 배에 바람을 가득 넣어 앞으로 쑥 내밀었습니다. 그리고는 깍두기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날름 넣고 우지 씹었습니다. 전에 할머니가 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밥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말로 백 번째 손님이 국밥을 공짜로 먹는 일이 날마다 생기게 된 것입니다.
2백 번째 손님이 되어 같이 온 사람들까지도 공짜 국밥을 먹는 일도 가끔 있었습니다.
한 그릇의 국밥이 이토록 따뜻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요? "백 번째 손님"은 단순한 나눔의 이야기를 너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사랑과 은혜의 실천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국밥집 주인의 따뜻한 배려는 처음엔 단순한 이벤트처럼 보입니다. ‘백 번째 손님에게 공짜 국밥을 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홍보성 아이디어일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그 섬김은 가난한 할머니와 손자에게는 ‘한 끼’ 그 이상의 선물이었습니다.
소년이 돌멩이를 세며 계산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할머니께 대접하고 싶어서." 이 아이의 마음에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보다 깊은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은 세상적인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하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작은 사랑이 국밥집 주인의 마음을 움직였고, 주인의 주변 사람들의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가진 것으로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이야기는 ‘없는 가운데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할머니는 국밥 한 그릇을 손자에게 양보했고, 손자는 그 사랑을 갚기 위해 자신의 모든 마음과 시간을 드렸습니다. 주인은 그 사랑을 품어 마침내 기적 같은 일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는 말씀처럼, 누군가를 위해 한 번 더 계산기를 내려놓고 사랑을 계산해보면 어떨까요? 하나님 나라의 수학은 세상의 계산과 다릅니다. 하나를 나누면 둘이 배부르고, 둘을 나누면 모두가 배가 부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될 수도 있고, 낯선 이에게 건네는 미소 한 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섬김과 나눔을 통해 그분의 큰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백 번째 손님"이 되어줄 용기가 우리에게 있기를, 그리고 누군가에게 "공짜 국밥 같은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우리 안에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그렇게, 일상 속에서 기적이 되어 흘러갑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