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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사무엘상하

사무엘상 - 닫힌 태 열린 하늘, 한나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9.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한 바 기도한 것을 허락하신지라"(사무엘상 1:27)

시골 마을 어귀에 오래된 절이 있었습니다. 그 절 마당 한켠에 서 있는 돌부처의 코는 이상하게도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대를 이어 그 코를 만지고, 어떤 이는 몰래 조금씩 갈아서 물에 타 마셨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 그것은 사람이 자기 정성과 힘으로 얻어내야 할 어떤 것이라고, 그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믿어 왔습니다.

사무엘상 1장의 한나도 아이가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이야기를 정성 들여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식의 교훈으로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홀로 일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 땅에 엘가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나는 사랑을 받았지만 아이가 없었고, 브닌나는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한나가 임신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나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태를 닫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훗날 그 태를 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관여할 자리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임신을 뜻하는 히브리어 '
레헴'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는 뜻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즉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인간의 생식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느냐 임하지 않느냐의 문제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격동시켰습니다. 자녀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자녀가 없는 한나를 매년 제사 때마다 울게 만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브닌나 자신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설움을 풀어낼 곳이 없었던 브닌나는, 자기보다 약한 자리에 있는 한나를 찾아 그 위에 자기 분노를 쏟아부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두 여인 사이의 오래된 가정불화가 아닙니다. 사사기 시대, "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 시대의 축소판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마치 자기 능력으로 얻어낸 것처럼 여기고, 그것이 없는 사람을 정죄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자녀를 잘 키웠다는 이유로, 사업이 잘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은혜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여기며, 그렇지 못한 이웃을 은근히 내려다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브닌나는 바로 그 마음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음식도 먹지 못할 만큼 괴로워하던 한나는 실로의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남편의 위로도, "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으냐"는 말도 그의 마음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위로로는 닫힌 것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서서 서원합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이를 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드리겠다고 말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늙은 제사장 엘리는 그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한 여인으로 오해합니다. 영적 분별력을 잃은 제사장이 진짜 기도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장면은, 형식은 있으나 생명이 빠져나간 종교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해가 풀리고 엘리가 "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축복했을 때,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직 아이는 없습니다.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얼굴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임신보다 먼저 그의 근심을 거두어 갔습니다.

이윽고 한나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사무엘이라 짓습니다. "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젖을 뗀 후, 약속대로 그 아이를 성전에 데려가 엘리에게 맡깁니다.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자기 것이라 움켜쥐지 않고 다시 돌려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이런 여인들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사라, 리브가, 라헬, 삼손의 어머니, 그리고 한나, 하나같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리에 있던 여인들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능력이 통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의 능력이 완전히 끊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야만 그 열매를 두고 아무도 "
내가 해냈다"고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사 54:1). 바울은 이 원리를 아브라함에게 적용합니다. 백 세 된 몸, 죽은 것 같은 사라의 태 앞에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롬 4:17~22).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은혜,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돌부처의 코를 갈아 마시던 그 마을 여인들의 마음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반복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면, 더 많이 헌금하면, 더 열심히 봉사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형태만 바뀐 돌부처 신앙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거듭난 것이 "
썩지 아니할 씨", 곧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벧전 1:23). 우리 안에 진리의 씨,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겨지는 것이야말로 진짜 잉태입니다. 그리고 그 씨는 우리의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만 심겨집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 오래도록 닫혀 있는 자리가 있습니까? 기도해도, 애써도 열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한나처럼 음식도 넘어가지 않을 만큼 답답한 밤이 있습니까? 성경은 그 닫힌 자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문을 여는 것은 당신의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애써 코를 갈아 마시듯 자기 힘으로 그 문을 열려 하지 말고, 한나처럼 그 문 앞에 조용히 나아가 소리 없이 마음을 쏟아놓으십시오. 응답이 오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면 얼굴의 근심이 먼저 걷힐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