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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4. 5.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장 33~35,51절)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떡인 만나와 빈 들에서 맛보았던 오병이어의 떡은 모두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표적을 보면서 오로지 이 땅의 떡에 관해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당신을 좇아온 사람들을 나무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로 죄인들을 살리러 이 땅에 오신 분이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떡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을 충족 시켜주는 물질적 축복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인 영생이었습니다.

 

광야의 만나 사건과 오병이어의 사건은 바로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자, 주님을 좇아왔던 많은 사람이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주님을 좇아오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은 예수로 말미암는 영생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이 땅의 떡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이 메시지로 담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당신을 좇아오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따라온 사람들을 기쁘게 품어 안아 주지 않고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셨을까요?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디베랴 바다를 건너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산 위에서 그 제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디베랴 동쪽 광야에서 서쪽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풍랑에 빠지면 모두 죽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 나타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은 그 즉시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게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요단 동편 광야에서 요단 서편 가나안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새로운 출애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풍랑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홍수와 바다에 빠져 죽게 될 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명력을 회복하고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지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으로 부연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 바다, 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합니다. 그 심판과 저주가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는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그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그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물을 밟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해내는 사건은 이미 구약에 여러 모양으로 예언이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시77:16)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욥9:8)

 

이렇게 구약에 예언된 대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바다와 홍수, 즉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주님께서 밟고 올라서시니까 풍랑이 잔잔해지고 제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홍수로 다 죽어 가는 세상에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주님을 상징하는 방주로 들어갔더니,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영접했더니’ 그들이 안전하게 그들의 가려던 땅에 도착하여 죽음을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 사건에 등장하는 ‘방주’ ‘테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떡을 먹고 세상 것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달라고 좇아온 사람들에게 ‘나를 믿는 자들만이 영생을 얻고 진정한 안식과 행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풍랑을 헤쳐 가며 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행복의 땅, 평화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친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의 자랑이나 육신의 정욕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 봐도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와서 이 땅에 또 다른 다윗 왕국을 세우면 자신들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매불망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육신을 살찌게 할 세상의 떡을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우리는 저주의 물, 심판의 홍수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바로 그 복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은혜로 영생을 주시겠다는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가 아닌 ‘주님 저희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세요’하고 요구했습니다. 기독교는 부와 명예를 얻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더럽고 추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저 좀 살려 주세요’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은혜의 장중으로 숨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