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창세기 15장 5~6절)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며,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사랑, 하나님의 주권, 믿음, 의’ 등에 의해 설명되고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본문에 그 성경의 핵심 중, 두 가지 믿음과 의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믿음’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유일한 출생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로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의’ 또한 성경의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신학에서는 그 ‘믿음에서 말미암게 되는 의’를 가리켜 ‘이신칭의’라 부릅니다.
로마서의 핵심 사상이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가 로마서 1장을 통해 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성경은 아브라함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는 인과율이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을 이신칭의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대해 올바른 정의를 살펴보면, 창세기는 천지와 만물, 그리고 인간의 창조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창조물 중에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력인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 복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고 그 복에 의해 행복과 안식에 이를 수 있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인 인간이 타락하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죄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째 아들 가인이 의로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행복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자기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가 다 경쟁자가 됩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신보다 나은 평가를 받는 동생 아벨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렇게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비록 그가 동생이라 할지라도 경쟁자로 간주하여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지키고 채우려 했던 가인 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그렇게 자기 이외의 모든 이들을 경쟁자로 여겨 살해하는 살인자들로 살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이 세상과 역사와 스스로의 인생에 왕이 되어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통제 성향과 자기 보호의 성향은 하나님의 저주를 부르게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는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무섭게 경고 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의뢰하지 않는 자들이 스스로의 힘을 통하여 자신들을 지키고 세상의 힘을 쌓아 네피림이 되고, 유명한 자가 되고, 영걸이 되고, 거인이 되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지가 홍수가 되어 부어지는 하나님의 눈물로 나타난 것이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홍수로 멸절되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눈에 찰만한 의인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는 노아처럼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노아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세상의 영걸이 되고, 네피림이 되고, 유명한 자가 되고자 하는 희망이 없는 인간 세상은 바벨탑 사건을 통해 또 한 번 불가능하고 무기력하고 추악한 그의 정체를 폭로 당합니다.
인간들이 또 다시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 세상의 영걸이 되고자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노아와 셈의 후손들까지도 포함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때는 노아와 셈이 시퍼렇게 살아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 역시 홍수와 마찬가지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그렇게 성경은 불가능하고 무력한 인간 세상, 그 저주받을 바벨론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자로 설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명명백백하게 증명을 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불가능한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열심과 노력과 능력과 선에 근거하지 않은 당신의 계획과 당신의 힘으로, 오직 당신의 주권에 의해 창세 전에 선택된 당신의 백성을 건져 내시는 구원의 사건이 있을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주도되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 이야기의 단초가 바로 창세기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바벨론)를 떠나는 사건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입성하는 하나님 백성의 바벨론을 떠나는 사건은 애초에 인간 측에서의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사건이 바로 믿음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불가능한 인간의 표본으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자들처럼 역시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타락한 자에게 하나님의 선택과 인도하심이 선물로 부어져서 그가 바벨론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믿음을 소유하고 발휘하는 사람 측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그러한 능력이 없는 불가능한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단번에 ‘주어지는’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외부에서 그 인간의 내면으로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을 객관적 믿음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죄인들에게 무상으로 부어진 객관적인 믿음에 의해 그가 그의 인생을 통하여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으로 내어놓게 되는 과정을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은 인간들에게서 만들어지고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그 믿음을 발휘하는 사람이 그 믿음을 인과율에 의해 생산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아브라함 속에서 만들어져 발휘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인간 측에서의 모든 근거가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도되어지고 완성이 되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 사건을 이신칭의라 부르고 그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신칭의가 가장 처음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곳이 바로 창세기 15장 본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다시 하박국에 의해 보다 확실한 언어로 정리가 됩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2:4)
그리고 그 하박국의 이신칭의 구절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에 의해 더욱더 명확히 설명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롬1:17)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