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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 예수의 삶에 동참하는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5. 1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어베소서 5:18)

많은 사람들이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 헛갈리고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될 때 단 한번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그 이후에도 우리가 늘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 18절의 "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구절은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만 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을 받는 사람이 전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둘째로 복수형을 썼기 때문에 성령 충만은 소수 정예 기독교인들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수동형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함과 준비됨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이 구절은 시제가 현재 시제입니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령 충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 때 성령이 임하시기 전과 그 후를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성령 충만”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시작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과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한 것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에서 성령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한 사건을 통해 그 성령 강림의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시켜서 그들에게 가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려하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을 한 보자기에 넣어서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율법의 예(例) 대로 부정한 것을 못 먹겠다고 버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정하게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하면 안 된다고 혼을 내 주십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가고 고넬료와 그 일가는 가시적으로 임하시는 성령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고넬료의 이야기 바로 앞에 애니아라는 남자 중풍 병자가 일어나고 다비다라는 여자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의 이야기와 그 두 이야기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성경은 원래 장, 절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고 다시 한 번 잘 읽어보면, 그 애니아와 다비다의 이야기는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9:36~40)

40절을 보면 베드로가 다비다를 일으키는데
“다비다야 일어나라”“다비다쿰”이라고 외칩니다. 다비다에게는 도르가라는 이름이 있었음에도 일부러 “다비다 쿰”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말은 바로 야이로의 12살 먹은 딸을 살리신 예수님의 외침 “달리다쿰”을 여기다 옮겨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야 일어나라”라고 외치십니다. 그게 "달리다쿰"입니다. 그러면 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시는 사건 중간에 열 두해 혈루 증을 앓는 여인의 사건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살 먹은 야이로의 딸이 일어난 사건은 바로 이 12해 혈루증 여인이 치료를 받고 구원을 받은 사건과 동일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다고 나옵니다. 이 “옷 가“”옷 술“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옷 술은 율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율법을 통해 치유를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은 그 “옷 술” 때문이 아니라 “그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혈루 증 여인이 구원을 받은 사건이며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이며 다비다와 애니아가 일어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전에 고넬료의 사건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사건들도 역시 구약과 신약이 갈라지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 사건들이 지금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과 동일한 메시지를 갖고 있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제사와 율법이 여인의 후손인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이해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분명 구약의 백성들도 그 메시아를 멀리서 기대하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것을 이해하고 기다린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약 시대에도 성령이 임하셨습니까? 우리가 알기로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께서 불의 혀처럼 처음 임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필요할 때에만 잠간씩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로 말미암아 성령이 이제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 하게 되셨습니다. 이게 신약과 구약의 갈라짐입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이제 구약의 그림자처럼 희미한 구원과 신약의 뚜렷한 구원이 확연히 갈라지는 사건인 것입니다. 고넬료는 성령이 임하기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1~4)

여기에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제사 용어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때 그 제물이 타는 연기가 하나님 앞에 올라감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인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역시 “기념물이 되었다”, “즉 제물이 되었다”라는 제사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제사로 올려졌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미 구약적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에게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까?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미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야로 부르고 있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알게 하신 분은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럼 구원 받은 것이 맞는데 왜 또 그 들에게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해야만 합니까? 역시 그 사건도 구약과 신약의 놀라운 차이점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눈에 보이게 가시적으로 다시 구원받은 자들에게 임한 것은 단순히 은사나 방언이나 예언을 하는 차원에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 그렇게 눈에 보이게 임하신 사건은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제사나 율법이 가리키는 메시야를 단지 멀리서 기다리며 그림자로 보고 구원을 받았다면 신약 시대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심으로 그 성령이 구약 시대처럼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셔서 이제 친히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대 전환점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 강림의 시연회 인 다비다의 죽음과 야이로의 딸의 죽음과 수넴 여인의 아들의 죽음이 문제입니다. 왜 구원받은 하나님의 딸, 다비다의 죽음과 부활로 그 성령 강림을 예고할까요? 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에 아이가 죽습니까? 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하나님의 도움을 빌어 탄생하게 한 그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이제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신구약을 넘나들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평생을 광야처럼 살다 가셨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를 요약해 주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에게 너의 힘으로 너를 증명해 봐라”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신명기에서도 똑같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목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예수님과 성도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이 왜 광야로 나갔나요? 사람이 떡으로만 그러니까 이 세상의 것들, 이세상의 힘 그런 것을 목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그 뜻을 좇아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이 바로 광야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심과 동시에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의 광야의 삶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게 지혜 있는 자들의 삶이고 그게 성령 충만한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 뭡니까? 예수님의 삶에 동참해서 그 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신 하나님의 성품,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삶, 그것을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노력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열심히 하나님의 성품에 나를 맞춰 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다른 이들을 살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제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지혜 있는 자처럼 행동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셔서 거룩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성령 충만이라는 주제를 오해하곤 합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특별한 체험으로만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성령 충만은 특정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수준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이 구절은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명령형이라는 점에서 성령 충만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수형이라는 점에서 이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명령이며, 수동형이라는 점에서는 우리가 성령을 조작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야 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성령 충만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갈망하고 누려야 하는 현재 진행형의 삶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성령 충만의 실체를 경험한 공동체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어떻게 임하셨는지,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증언합니다. 그중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은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그는 경건한 이방인이었고, 기도와 구제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구약적 신앙으로 구원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성령께서 그의 집에 임하신 것은 단순한 능력 체험이나 은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시기 직전, 다비다와 애니아가 일어나고, 이전에 야이로의 딸과 수넴 여인의 아들이 살아나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모든 이야기는 한 가지 공통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 은혜는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을 때 치유받은 사건은 단지 율법의 능력이 아닌, 믿음의 능력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야이로의 딸에게 예수께서 "달리다쿰"(소녀야 일어나라) 하셨듯, 다비다에게도 "다비다쿰"이라 외친 베드로의 말은 단순한 부활 기적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을 상징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그 부활은, 이제 신약의 시대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매일 일어나는 영적 부활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복음의 핵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 성령은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며,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빚어 가십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더 이상 단순한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격적 동행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힘과 가치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의 광야로 이끄시고,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인내와 사랑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남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시리라 (엡 5:14).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지혜 없는 자처럼 살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 뜻은 곧 거룩이며,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단지 우리의 감정이나 체험을 위한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충만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을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말씀에 깊이 잠기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날마다 실천하십시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존재가 됩니다. 오늘도 깨어, 예수의 삶에 동참하시기를,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