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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그 신령한 실재를 먹는 자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5. 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이니라."(고전11:27~29)

이 말씀은 성찬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 성도가 성찬 상에서 예수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생명나무의 저주가 풀렸다는 증거입니다. 창세기에서 막혔던 것이 고린도서에서는 풀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명나무에 접근은 스스로 따 먹으려고 스스로 이루고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 종교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자들이 생명나무 실과인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시려는 것은 죄로서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나무 실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성찬’이라는 종교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열심을 가리켜, 오히려 죄를 먹고 마시는 저주받을 일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은혜의 깊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생명나무 실과를 향한 인간들의 욕망과 야심, 자기 주체성과 자기 존재성 챙기기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종교행위는 전부 저주받을 죄란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이 세상의 삶의 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생명나무를 감추어 놓으시고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그 생명나무 실과를 취득하려하는 인간들의 모든 시도와 노력을 다 부수어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존재의 본질과 실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그리고 그 두 존재 사이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가 성립이 될 수 있는가를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빛나는 것을 쫓습니다. 기술, 철학, 종교, 도덕, 자기계발과 이념들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애씁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손을 뻗어 생명나무에 도달하려 했던 것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명’을 소유하려는 열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스스로의 손으로 그 실과를 따 먹으려는 모든 시도는 저주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은 성찬에 대한 경고이자, 동시에 구속의 복음이 열려 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생명나무의 실과가 이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허나 그 생명은 아무렇게나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 11:28) 이 말씀은 성찬이 단순한 의례나 종교적 습관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생명나무는 여전히 아무나 손댈 수 없는 거룩한 실재이며, 그 실과는 단지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나무 그 자체입니다. 그분은 막힌 에덴의 문을 열고 오신 참된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단지 떡과 포도주를 입에 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주체성, 자기 의, 자기 업적과 자랑을 모두 내려놓고,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믿음만이 참된 성찬을 가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행위나 자격으로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지만, 그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떡과 잔 안에 담긴 '분별되지 않은 생명'을 대면하고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1장 29절은 말합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종교심, 행위 중심의 경건함, 자기 열심으로 가득 찬 신앙을 철저히 거부하신다는 무서운 선언입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자 인간의 지혜, 훈련, 정성을 총동원하는 모든 시도는 여전히 동쪽 바깥에서 행해지는 아담적 시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찬 앞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를 살펴라. 너는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이 상 앞에 서 있는가?”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위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성도들은 이 저주의 현실 속에서, 여전히 동쪽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서쪽의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저주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사 24:15)  이는 동쪽, 즉 인간의 저주 받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백성의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령한 성찬, 보이지 않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들은, 세상 기준으로는 실패자이며 광신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압니다. 지금 우리는 외형적으로는 고통과 투쟁의 자리에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의 양식인 생명을 먹고 있는 존재임을 말입니다. 성찬은 단지 교회 안에서 행하는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방식이요, 존재 방식이며, 복음의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신앙의 경력과 지식, 나의 열심과 자격으로 이 떡과 잔을 받아들고 있는가? 생명나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허락됩니다. 그 은혜는 무릎 꿇는 자에게만 부어집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분별할 수 있는 신령한 자들로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십시오. 세상의 동쪽에서 고난받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서쪽의 생명을 먹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나무를 허락하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자기 열심과 자격으로 이 상 앞에 서지 않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의 살과 피 안에 감추어진 영광과 생명을 보게 하시고, 그 신령한 실재를 더욱 깊이 먹고 마시게 하소서. 저주의 동편 속에서도 믿음으로 서쪽의 생명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