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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5. 31.

상수리나무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께 바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서,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창세기 12장 5~9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이 진짜 약속의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은 하늘의 땅임을 알고, 그 가나안 땅을 나그네처럼 통과하여 지나갑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은 지나가는 곳이지 그 자체가 종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그 남쪽의 땅, 남방 헤브론에서 그의 생을 마칩니다.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의 가나안 입성에서 가나안 남방에서의 마침까지 즉,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겪고 익혀야 했던 순례의 내용이 압축된 구절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가 이 땅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잘 배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어떤 결과를 얻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선 자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뀌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을 공부해 보면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전혀 그런 기대와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처음 당도한 곳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였습니다. 히브리어 ‘모레’‘지침, 교사’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는 종종 ‘무당이나 점쟁이’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수리나무’는 구약에서 가나안 종교의 문란한 종교의식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던 나무입니다. 지금 ‘모레’ ‘상수리나무’라는 단어를 통해 아브라함이 도착한 가나안의 세겜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이방 신전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당도한 땅은 하나님께서 논 갈고 밭 갈고 잘 정리해서 잘 먹고 잘살라고 준비해 놓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풍요와 다산의 가나안 이방 신상과 이방 신전이 있는 땅이었고 그 이방 신에게 속하여 풍요와 다산을 좇는 가나안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땅이었습니다.

 

그는 풍요와 다산을 좇는 가나안 사람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 그 땅에 정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보를 잘 보면 아브라함은 북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내려옵니다. 가나안 땅의 북쪽인 갈릴리 땅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초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려 계속해서 황무지뿐인 남방으로 쫓겨 가는 형국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좇는 사람들은 자기 이외의 모든 이들이 경쟁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낯선 이방인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풍요와 다산의 신이 권세를 휘두르는 가나안에서 그 세상을 등지고 살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예수를 믿게 된 성도가 처음 맞게 되는 현실이 바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때 비로소 세상의 정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의 다스림을 받는 자로서 세상과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동일한 목적과 기대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그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추악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예수를 알게 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면, 그는 그 세상이 얼마나 죄가 많은 곳이며 그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들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교육하는 영적 훈련의 순서입니다. 성도가 새로운 눈을 뜨게 되면 먼저 세상의 실체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올바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이방의 우상들과 천국 백성인 나와는 전혀 다른 형질의 풍요와 다산만을 좇는 이방인들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바로 하나님 나라에 넣지 않으시고 세상 신이라 불리는 사단과 그 사단의 자식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 던져 넣으실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속해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다름’을 그들 속에 있는 믿음을 발휘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고 성도를 이 이방 땅에 던져 넣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요와 다산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이들이 어떠한 선택으로 어떠한 삶을 사는지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오직 풍요와 다산만을 목적으로 사는 세상은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행복해하고 기뻐하지만 너희는 그러한 세상의 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으로 행복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음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들의 눈을 열어 풍요와 다산의 우상을 좇는 모레 상수리나무라는 세상의 실체를 보게 하신 후에 ‘너희도 이 길을 가려느냐?’하고 우리에게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이방 사람들처럼 너희도 모레의 지침을 좇아 풍요와 다산을 좇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을 정화 시키며 오직 주님께만 충성을 다하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구원하신 후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으로의 파송을 통해 주님께서 성도에게서 보고 싶은 것은, 성도가 세상 속에서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고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나섰던 어떤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그런데도 나를 좇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진정으로 눈을 뜨지 못한 자들은 ‘내가 왜 그런 힘든 길을 가야해?’라며 돌아서게 되는 것이고, 새로운 눈이 뜨여 세상의 정체를 본 성도는 풍요와 다산의 세상과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의 주님 사이에서 망설임 없이 주님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 세상에서 살되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과 헌신의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좇겠다고 나선 당신의 백성들을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앞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그토록 매력적인 세상의 모든 우상과 세속 신의 유혹을 뿌리치고 주님만 좇아 살겠다는 고백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의 주된 내용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