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대할 줄 아는 언어로 대화하면 그는 머리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한다면 그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신의 소통 방식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마취 중이거나 혼수상태일 때, 혹은 잠들어 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배 속에 있는 태아도 엄마와 아빠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의사소통을 하지는 못해도 대화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소통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말을 건네십시오.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말하는 것 말고도 다양합니다. 포옹이나 마사지 같은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서도 소통이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종종 아기나 새끼 고양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며 아픈 사람들에게 안겨주곤 합니다. 그들이 미소를 지으며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신체나 정신의 장애가 삶 그 자체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소통할 수 없는 존재는 세상에 없습니다. 단지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존재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벽을 느낍니다.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다가가려 해도 서로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과는 도저히 소통이 안 돼.”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사람의 말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꾕과리와 같고…” (고전13:1)
성경은 소통의 핵심을 ‘사랑’으로 봅니다. 언어의 유창함이나 논리의 명확함보다, 마음을 담은 사랑이 상대에게 닿는 참된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 방식, 우리 언어로만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상대의 언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하늘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공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셨고, 우리의 눈높이에서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소통은 단지 귀로 듣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을 보시느니라.”(삼상 16:7)
사람들은 종종 말을 듣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기도 합니다. 마취 중이거나 잠에 빠졌을 때, 혹은 치매를 앓고 있을 때조차, 그들의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태아조차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깊은 수준에서 소통하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렇듯 ‘소통 불가’는 대부분 방식의 문제이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은 머리로 이해하는 말보다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말 외에도 수많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포옹, 손을 잡는 따뜻한 접촉, 함께하는 침묵, 그리고 기도,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말로 다가갈 수 없을 때, 우리는 함께 울어줄 수 있습니다. 그 침묵 속에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껴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이 그 사람에게도 전해집니다.
세상에 소통할 수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포기하지 않고 다가간다면, 심지어 아무 반응이 없어 보여도, 그 마음은 반드시 전달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고전13:8)
그러니, 오늘 다시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네보십시오. 기도로, 미소로, 작은 친절로 말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어를 통해 사랑을 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