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잘 알려진 성화중에 밖에 서서 안을 향해 문을 두드리는 그림을 한 번쯤은 보았을 것입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에 손잡이도 고리도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롭고 인자하며 세상의 모든 사랑을 가득 담고 있지만 그 문은 밖에서는 도저히 열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안타까운 마음으로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누군가 열어주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밖에 서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손잡이가 없는 문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위한 구원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 과연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올바르고 타당한 모습일까요?
구원자는 한없는 사랑과 따뜻함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지만, 우리들은 교만한 감정으로 마음의 문을 꼭 닫아놓은 채 어둡게 살기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원자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지혜와 용기는 그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는 참되고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아닐까요?
진실한 생활 속에 있는 사람은 지혜와 진리를 알아듣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지만,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불안한 삶 속에 있는 사람은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끝없이 깊고 어두운 삶을 지겹도록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지혜와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요구하고 바라는 것만을 앞세우거나 우선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고 요구하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기대하는 사람의 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지혜나 진리를 향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원만한 조화가 이루어지는데 훌륭한 역활을 하여 행복한 생활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내적으로 진리와 지혜, 아름다운 품성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평화와 고요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상대방이 처한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약 서로의 입장이 바뀌었을 경우에도 여전히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간단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상대에게는 크고 무겁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요구한 만큼 그가 나에게 요구했다면?
상황을 바꾸어 보십시오. 답은 간단하게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