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 4장 26절)
창세기 5장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족보에 기록된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들의 삶은 순종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순종의 삶, 비움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우리 주님처럼 원수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는 죽음의 삶, 비움의 삶을 본받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삶이 반드시 나와야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때려죽인 가인의 옆집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억울하고 분한데 그들한테 또 맞아 죽어야 하니 더 억울하고 분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그 삶을 잘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살다 가셨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보이는 것이 없는 삶, 믿음의 삶을 우리의 구원 방법으로 채택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져야 새것으로 부활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것을 대충 고쳐서 쓰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죄인들을 대충 고쳐서 만들지 않습니다.
다 불살라 버리고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이 땅에서 역 창조의 삶, 부서지는 삶, 죽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15:36)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의 삶을 죽어야 하는 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씨는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지는 것처럼 죽지만 사실 그 죽음은 아름다운 꽃과 실과로 태어나기 위한 필연적 과정입니다.
이렇듯이 성도가 이 땅에서 육신을 죽이는 삶은 아름다운 새 생명으로 가는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썩을 몸을 죽여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육의 몸을 심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영광스러운 새 삶이 시작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법칙입니다. 그 법칙에 예외는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이 땅에서 죽음의 삶, 비움의 삶, 용서의 삶, 사랑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비움의 삶을 사는 것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움의 삶을 사는 자들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이 역사 속에서 죽어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죽음의 삶을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한국 모 교단의 총회장을 지내신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자분이 아이를 낳아서 그 목사님 방문 앞에 놓아두고 이 아기가 목사님의 아기라는 편지 한 장만 남겨둔 채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모함을 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졸지에 불륜을 저지른 파렴치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변명도 해 보고 부인도 했지만 교인들이 명백한 증거 앞에서 변명한다고 더 다그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서 삼 년간 남대문에서 지게를 지셨답니다. 물론 그 아이도 목사님께서 맡아서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아이를 두고 간 여자가 돌아와서 사실은 자기가 거짓말을 했노라고, 목사님께 아기를 맡기면 잘 키워주실 것 같아서 그랬노라고 실토를 했습니다. 그때 그 교회 교인들이 남대문으로 목사님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물었답니다.
'목사님 왜 그때 아니라고 더 변명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내가 계속해서 아니라고 한들 당신들이 믿어 줬겠어?' 처음에는 좀 섭섭했지만 하나님께서 뭔가 뜻이 있으셔서 나를 그렇게 놔두셨겠지 하고 생각하니 그 섭섭하고 억울한 감정도 이내 사라지더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사님의 모습을 보고 아기를 두고 갔던 여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는 그게 분명 모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목사님께서 그 모함에 대응을 안 하시고 남대문에서 지게를 지시는 것을 보고 저분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싶다고 주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한 삼 년 죽어줌으로 해서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우리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앞으로 30년도 더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하셨답니다. 그러시면서 삼 년이라 할지라도 나 하나만큼은 그 상대방의 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편이 되어서 함께 돌을 던지면 잠깐 동안 나는 괜찮은 편에 설 수 있지만 대신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살리라고 주신 생명이 죽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나의 배우자에게 돌을 던져도 나는 그 배우자를 품어 안고 대신 돌을 맞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만큼은 그 배우자를 끝까지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죽어짐의 삶이고 생명을 낳고 죽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어 주세요. 그럴 때 생명이 해산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