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한복음 19:17~1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위에는 예수님과 강도들과의 사이에서 발생되는 일과 십자가 밑에는 십자가를 둘러싼 마리아들과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군병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넘겨받는 요한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옆엔 강도 둘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내용을 보면 그 둘이 다 예수님을 욕했다 라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 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마가복음 15:32)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있던 두 강도도 이스라엘의 왕인 메시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그의 능력을 보여주면 자신들도 예수를 믿어 주겠다란 비아냥과 욕을 했습니다. 예수님 곁의 두 강도는 모든 인류를 상징하는 모형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그런 강도의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강도의 괴수 자리 가운데에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원래 강도인 바라바 자리였습니다.
이사야서 53장 12절을 보면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이사야 53:12)
예수님은 범죄자가 되셔서 죽기로 이미 결정이 되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야 할 강도들 중에서 예수님이 그 강도들을 대신하여 강도가 되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범죄자, 강도로 태어나는데 그러한 강도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져
한쪽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것을 강탈하며 '나'라는 우상을 위해 '나' 이외의 존재는 모두 경쟁자요 적으로 간주하는 게 죄인들의 속성이요 마귀의 속성입니다. 그게 바로 강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강도의 모습으로 멸망의 불못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쪽은 여전히 강도는 강돈데 구원받은 면목없는 강도들인 것입니다. 왜 면목없다고 이야기를 하냐면 성도라는 모습을 하고 죽는 날까지 강도처럼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구원받은 면목없는 강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있던 두 강도가 똑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하던 한편 강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누가복음 23장 39절을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39~43)
한 쪽 강도는 "너가 그리스도 아니냐, 그렇다면 너와 나를 구원해 봐라"라고 예수님을 욕하면서 조롱을 합니다. 그건 십자가 아래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우리로 너를 믿게 해 봐'라고 조롱했던 그 유대인들과 정확하게 같은 모습입니다. 그 모습의, 그 중심에는 전부 인간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세상의 현실을 , 이 세상의 현실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인본주의와 현세 구복적 현실 지상주의가 거기에 깔려있는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곳이고 자기 자신들은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대단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한 편 강도와 십자가 밑에 있던 그 인간들이 동일하게 요구한 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분명 조금 전까지 다른 편 강도와 합세해서 능력을 발휘하여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 보라고 예수님을 조롱하던 다른 편 강도가 갑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합니다.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도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옆에 함께 매달려 있는 친구한테 그렇게 얘기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여기서 죽어야 되지만, 저분은 여기서 죽을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야"
라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 좀 생각해 주세요."
이게 바로 성도의 마지막 목표지점이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큰일나는 존재니까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에 나를 좀 기억해 주세요."라는
그런 처절한 외침이 성도의 마지막 목표지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릴없이 세상에게 당하여 죽음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거기서 그분이 내려갈 수 있다라는 그러한 기대는 조금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 그분에게서는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뻘거 벗겨져서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곧 죽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적 관점에서 뭘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분에게 한 강도가 자신의 내세를 부탁하고 있단 말입니다.그게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백마를 타고 철장을 든 강력한 왕의 모습으로 오신, 민속 메시아 사상 속에서의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초라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무력한 예수를 경험하면서도 그분에게만 진정한 승리가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게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성도의 삶 속에서 예수님이 전혀 무력한 존재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존재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냥 무력하게 죽어가는 그 예수에게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좀 기억해 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했던 그 강도처럼 너희들도 그런 무력한 예수를 경험하면서 그 예수가 주는 진짜 승리가 뭔지 진짜 복이 뭔지를 깨달아, 믿음으로 그분을 붙들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를 예수님이 전혀 안 도와주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완전히 침묵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 쪽은 이 세상의 힘을 발휘해서 자신의 세상적 구원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에, 세상적 구원이라는 것은 세상에서의 만족, 세상에서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걸 요구하고 있는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에 의해서 그분의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된 자는 세상적 힘을 완전히 상실하신 무력한 예수께 다 가올 세상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와 세상과의 다른 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잘 기억하시면서 "아 이 삶이 맞구나!"를 인정하며 살면서 하나님을 배우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꼭 붙드는 이로 지어져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