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에베소서 2장 4-5절)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청량리역 건너편에 있던 성바오로 병원에 가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집안을 비우신 어머니 때문에 내 도시락 당번은 졸지에 아버지가 맡아서 하게 됐습니다. 요리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아버지는 내리 3일 동안 꽁보리밥에 김치를 싸주셨습니다. 4일째부터는 부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요리도 못해? 계란이라도 부쳐서 싸주어야지 만날 김치만 싸주고... 오늘 도시락 안 가져가!"
짝인 예쁜 여학생의 도시락에는 늘 계란 부침과 당시로서는 먹기 힘든 소시지 볶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 도시락에서 김치 국물이 슬슬 흘러나와 지독한 냄새를 풍겨댔습니다. 그러자 점심시간이 고역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악화돼 어머니는 10일째 병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소풍날이 되었습니다. 망우리를 지나서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으로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소풍날이지? 밥 먹고 빨리 가거라. 오늘은 아빠가 특별히 맛있는 반찬을 준비했어. 대신 미리 열어보지는 마."
난 마치 소원을 모두 들어준다는 도깨비 방망이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점심시간이었습니다. 나는 한껏 호기를 부리면서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마치 판도라의 보물 상자를 열듯 도시락 뚜껑을 열어젖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곳에는 김치 국물이 반쯤 적셔 있는 흰 쌀밥만 덩그러니 보이는 것이 아닌가.
"넌 소풍 때도 김치냐?"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온 산을 메아리치는 것 같아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오후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아가 났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숟가락 하나 대지 않은 도시락을 아버지 앞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김치가 뭐 대단한 반찬이야!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나의 행동을 뒤로 하고 아버지는 마당에 던진 도시락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시락 밑을 잘 봤어야지. 친구들 몰래 먹으라고 맛난 반찬을 숨겨놓았는데. 아빠가 새벽에 일어나서 만든 요리를 맛도 보지 못했구나."
찌그러진 도시락을 엎어놓자 그 안에 마치 해바라기처럼 노란 얼굴을 내밀고 있는 계란 부침과 당시로서는 1년에 서너 번밖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값나가는 소시지 볶음이 들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