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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다'라는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5. 1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룻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신약성경에서 '행하라'라고 번역이 된 '포이에오'라는 헬라어는 히브리어 '아싸' 동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싸' 동사는 인간들의 율법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어떤 것, 즉 나타난 것을 잘 가르쳐서 그가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과 그렇게 하는 행위를 '아싸'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큰 틀을 네 단어로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구약의 큰 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르, 라아, 바달, 카라' 이런 순으로 큰 틀이 잡혀있습니다. '아마르'는  하나님의 말로써 진리 그 자체인 말입니다. 그 아마르, 진리의 말이 있고 그것을 나타난 것으로 보여주는 걸 '라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보다라고 번역을 하는데 '아마르 라아'는 그것 보다 굉장히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여진 것으로 '아 이게 그런 거구나' 라고 깨달을 때, 구별할 때, 그것을 '바달'이라고 합니다. 그걸 거룩이라 고도 번역을 하는데, '바달', '아 그거구나! 구별하는 것' 그리고 그걸 구별해 낸 사람을 '카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큰 틀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이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 '라아'에서 '바달'로, 구별하는 것,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오! 이게 그거였어? 보이지 않는 그걸 담고 있는 거구나'하고 했을 때, 그 '바달'의 단계로 넘어갈 때의 그 행위와 그렇게 만들어주는 행위를 '행하다(아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행하라(아싸)' 라고 하는 건 이런 것입니다. 희생 제사를 행하라(아싸) 라고 했을 때 그냥 수건이 덮인 율법으로만 보면 죽어라고 그 율법을 행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걸 휘장이 벗겨진 상태에서 보는 사람은 '
아, 영단 번에 드려진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드릴 희생 제사는 이제 다 없어진 거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희생 제사 드리면 안 되는 것이지' 라고 알게 됐을 때, 그것을 알게 해주는 걸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아싸)'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 하시고 어떤 데에서는 '맹세 하라!'고 합니다. 거기에서의 '하라'가 '아싸'입니다. '맹세가 되어라' 라는 것입니다.
"먼지에 불과한 너희를 내 영, 호흡, 말을 넣어 하나님과 방불한 그리스도인 만들어 나와 영원으로 살게 하겠다"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맹세였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일곱 번 '난 그렇게 할 거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게 맹세이고 서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서원, '그 맹세대로 되어라!'가 '행하다(아싸)'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맹세의 행함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분이 끌고 가시는 그 과정 속에서 끌려가는 행함 속에 들어있는 게 우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라는 그 말을 전부 그냥 그렇게 껍데기로만 보게 되면 우리는 솔직히 몇 개만 하고 못하기 때문에 다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처럼 보였던 그들의 행위가 왜 주님께 ‘불법’이라 불리는 걸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벌을 받은 것일까요?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면, 진짜 문제는 그들이 '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에오는 히브리어 아싸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일을 하라'는 뜻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도가 시간 속에 구현되어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행함'은 단순한 율법적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아싸'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창세기의 큰 틀을 아는 것이 이 의미를 더 깊게 해 줍니다.

아마르(말씀) → 라아(보여짐) → 바달(구별됨) → 카라(부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아마르)이 어떤 형태로든 세상 속에 드러납니다(라아). 그 드러난 진리를 보고 '아, 이게 그거구나' 하고 구별하게 되는 단계가 바달,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께 불리운 존재가 카라입니다. 이 전체 흐름 속에서 우리가 '구별'하여 반응하고 참여하는 그 행위가 바로 아싸, '행하다'입니다.

예를 들어, 희생 제사를 드리라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그저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외적 행위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의 진짜 의미인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온전한 희생을 바라보는 자는, 더 이상 반복적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이때 '행함'이란, 단순히 제사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의미를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은 단순한 명령과 금령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맹세하신 언약 속에 있습니다.
"너희를 먼지에서 일으켜 내 말과 호흡을 넣어, 내 형상을 닮은 자로 만들어 영원히 나와 함께 살게 하겠다"는 맹세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서원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그 맹세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되어라'(아싸)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구절에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고, 어떤 구절에서는 맹세하라고도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맹세의 성취가 우리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뜻에 응답하며 그분이 이끄시는 행함에 참여할 뿐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십니다.
성경의 '이것 해라, 저것 하지 마라'는 말씀이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모두 지키려고 하면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율법을 외적인 행위로 지켜서 의롭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깨달음 가운데 '구별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은, 그분의 마음을 알고 반응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단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한 사람도 하나님이
“난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건 관계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반응하여 살아가는 삶,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께서도 '아신다'고 하시는 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지 눈에 보이는 종교적 행위나 봉사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는가,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했는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알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 진심, 맹세를 헤아리고, 그 의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짜 '행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의 굴레를 지우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의 본질을 보게 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계획 안에서 자유롭게 걷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 뜻에 반응하여 삶 속에서 드러내십시오. 그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입니다. 그 길 끝에, 주님은 우리를 알아보실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