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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가나안 땅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6. 1.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아브라함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 (신8:2~3)

 

가나안 땅은 우리가 뿌리박고 살 땅이 아니라 ‘통과해야’할 땅입니다. 그 땅은 우리의 충성의 대상과 신실의 목표가 오직 주께만 있음을 확인시키고 증명해야 할, 가나안의 신전들이 줄지어 있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나안 땅은 순례의 종착지가 아니라 순례자의 믿음의 질을 평가하는 시험장인 것입니다.

 

성도의 광야,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세상의 힘을 좇는지 시험하는 시험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떠한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얻어냈는지를 보면, 사라가 헤브론 땅에서 죽자 아브라함이 헷 사람들에게 가서 아내를 매장할 매장지를 좀 팔라고 말을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우거한 자’라 부릅니다. 자신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다 이 땅을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다가 갔습니다.(히11:13)

 

그렇게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기로 선택을 한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되는지 보면,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하나님의 방백이라 부릅니다. 거기서 방백이라는 단어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왕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생애와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니 아브라함은 자신들의 땅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복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행7:5)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이 세상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에게서 시작이 되고 완성되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땅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성숙으로 완성되는 땅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풍성히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생애와 존재와 인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땅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 속에서 특별한 ‘다름’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 삶을 아주 성실하게 잘 살아냈습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든 재산을 교회에 다 바치고 공산사회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장면은 풍요와 다산의 신전이 있는 세상 속에서 갓 생겨난 교회라는 공동체가 세상의 삶의 원리와는 정반대로 자기의 것을 모두 비워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더라는 것을 대비하여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땅에서 그러한 ‘다름’의 모습을 보여 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와 다산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른 판단과 다른 결정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며 그러한 삶 속에서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선 땅이 진짜 영적인 가나안,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그곳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신들을 섬기는 지역은 그 신들의 영토로 간주 되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선 자리는 가나안의 신전, 즉 풍요의 신 바알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그 땅은 바알 신이 소유권을 행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알 신의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삶을 살게 만드셔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겠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결국,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사단의 나라가 하나님 아들의 손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그 십자가의 열매가 미리 상징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은 이방 신들의 터줏자리까지도 임의로 넘겨주실 수 있는 분이심과 하나님의 이름이 인정되지 않은 이방 지역에서까지 주권적인 권한을 내세울 수 있는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고 그곳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단을 쌓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가나안 땅은 그 땅 주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창12:6) 아브라함은 그 이방 땅에서 완전히 무력한 자로 있는 것입니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너는 무력하나 나는 너의 무력함을 초월할 수 있는 절대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무기력함을 통감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께 자신을 붙들어 이끌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통감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의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저는 자신 없으니 하나님께서 저를 붙들고 이끌어 달라’는 고백은 ‘하나님, 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해 보지만, 자주 실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무력함을 넘어서는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저를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세요.’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단을 쌓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며 그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좇겠다는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처음 당도하게 되는 땅은 세상의 힘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인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서 축복과 저주,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역시 모레 상수리나무가 선택의 기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수24:1) 이렇게 세겜땅 모레 상수리나무는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이 세상 신, 즉 맘몬과 보이지 않는 땅을 제시하며 믿음의 순종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하나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기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 여정 내내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성도는 그의 인생 내내 모레 상수리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하며 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원수 갚지 말라 하셨으니 원수 갚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끼리 소송하지 말라 하셨으니 소송하지 않고 져 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오히려 손해를 보라 하셨으므로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라 하셨으므로 용서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오히려 원수의 입에 떡을 넣어주고 생수를 부어주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 바보가 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보의 삶을 선택하라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힘을 좇지 말고,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라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우리더러 삶으로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선택의 기로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옮겨 또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 동안 그가 지나간 자리를 연결하고 있는 것은 그가 가는 곳마다 쌓은 단인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이 땅에 남기고 간 것은 무슨 대단한 업적이 아니라 그가 그의 신앙 여정 동안에 곳곳에 쌓은 단 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발붙일 땅 한 쪽 없었습니다.

 

그가 무슨 대단한 도시를 건설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일생에 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드리는 단을 쌓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세상의 힘을 약속하는 세상 신을 제시하시고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는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물으실 때 그곳에 순종과 투신의 단을 쌓는 것이 성도의 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대표하는 두 가지를 들라면 ‘장막’ ‘단’입니다. 장막은 신앙의 진보라는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길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요 이방인들의 기동력과 전진을 상징하는 것이고, 단은 ‘나’를 드리는 헌신과 투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성숙을 향해 전진해야 하며 끊임없이 순종의 자리를 선택하면서 이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장막과 단입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을 거두고 옮길 때마다 그곳에는 그가 쌓은 단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투신이 담긴 단이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육신의 장막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영원한 하늘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의 자취를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세운 순종과 헌신의 단들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