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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6. 24.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 사람 여종이 있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주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온 지 십 년이 지난 뒤이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니, 하갈이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자기의 여주인을 깔보았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받는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였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다. 주의 천사가 사막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은 술로 가는 길 옆에 있다. 천사가 물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이 대답하였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주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주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주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척을 떠나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를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 그래서 그 샘 이름도 브엘라해로이라고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 그 샘은 지금도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그대로 있다.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아브람은,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다.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다. (창세기 16장 1~16절)

 

본문의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탄생하게 되는 약속의 자녀인 교회의 탄생 이야기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6장의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설해 줍니다.

 

율법 아래 있기를 바라는 여러분, 내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까?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태어나고 하나는 종이 아닌 본처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나고, 본처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두 여자는 두 가지 언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서 종이 될 사람을 낳은 하갈입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을 뜻하는데,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 주민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이며,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아들은 절대로, 종이 아닌 본처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한 여자의 자녀입니다. (갈4:21~31)

 

그러니까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미암게 되는 것이지 스스로의 노력이나 열심을 근거로 탄생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장에 가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후에, 생식기를 쪼갠 후에 이삭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은 인간의 생식 능력에 의해 태어난 자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구원은 죄로 인해 엉뚱한 행복을 좇느라 고통 속에 빠진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참 행복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각자가 추구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자기들의 힘과 이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여 찾으려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이들은 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께 순종하는 데에서만 찾아질 수 있음을 알고 예수만을 의지하며 그분 앞에 항복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면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맛보게 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는 만큼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쏟아놓은 모든 시도나 열심이나 업적이나 힘 등은 절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니 다 털고 하나님의 은혜 뒤로 숨으라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믿음의 다른 말은 기다림이다’라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 즉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며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다른 말은 기다림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더디다고 하나님마저도 부정합니다. 때로 그러한 세상의 조급증에 성도들까지도 흔들리고 동조하는 일이 생겨나곤 합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오랜 기다림의 ‘믿음’을 지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기다림 속에서 조급한 마음에 자꾸 세상의 행복들로 그 참 행복을 대체하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쪼갠 고기 사이를 횃불의 모습으로 지나시는 엄청난 언약의식을 보여주신 후에도 한참을 침묵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도록 자식을 안 주셨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과 사라는 적은 나이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여든 다섯 살이 되었고 사라도 일흔 살을 훌쩍 넘겨 경수까지 끊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라 해도 아침이면 거울에 보이는 자신들의 늙어가는 모습과 그 속에서 아무런 말씀이 없이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침묵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힘을 모두 빼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였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곧 자기의 꾀를 사용하여 또다시 인간 쪽에서의 일을 만들어 냅니다.

 

사라는 자기의 여종 하갈을 자기 남편에게 주어 임의로 자식을 생산해 내었습니다. 얼핏 보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적극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같이 보이지만 2절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라는 사라의 말에서 이미 사라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에 빠져 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브라함마저 그러한 아내의 요청을 냉큼 수락을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러한 아내의 불경한 요청을 거부하고 아내를 나무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아내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임신을 시켰습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이 되지 않은 자아 도취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인내 속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강행시키려 할 때 마귀는 항상 우리가 덥석 잡을 수 있는 거리에 하갈을 준비해 둡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을 때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다시스로 가는 배가 그곳에 있었습니다.(욘2:3) 그 배는 요나의 하갈입니다.

 

‘나의 하갈’은 내가 주님의 뜻을 나의 방법대로 이루려고 할 때마다 내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 육욕의 몸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대단한 종교행위나 커다란 업적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인생 속에서 흔들림 없는 신뢰로 아버지의 때와 하늘의 선물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삶을 인내 속에서 잘 살아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이는 것처럼 사는 삶,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사랑하고 섬겨주며 참고 인내하며 잘 기다리는 삶이 바로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위대한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누가 얼마나 잘 기다려 내느냐에 신앙의 경중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지름길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해서 가는 길은 하갈을 안겨주는 외도의 길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 방법론은 모두 하갈입니다. 그 하갈에게서 신앙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을 보면, 즉각적인 응답으로 행복해했던 세 사람에게 그 응답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서 출생한 이스마엘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 세 사람의 관계가 찢어집니다. 사라는 자신이 아브라함을 부추겼음에도 불구하고 하갈이 임신을 하자 아브라함을 원망하며 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 아브라함은 위기가 닥치자 자기의 씨를 받아 임신한 하갈을 사라의 처분에 맡겨 버립니다.

 

하갈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라와 비겁한 아브라함을 피해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이렇게 그 일로 모두 다 서로를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대대로 원수지간이 되어 싸우게 됩니다. 그렇게 성도의 조급증이 낳은 이스마엘들은 성도를 고통 속으로 몰고 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뿐만 아니라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시는 언약 의식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과 체험이 그의 위기 때에 믿음으로 발휘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좋은 책들을 통하여 많은 성경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신비한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우리의 머리만을 채우고 그러한 체험들이 전혀 믿음의 행위로 발휘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구를 들었을 때 지금까지 받았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비추어 사라의 요구를 조명해보거나 판단해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받은 계시의 말씀과 체험을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계시는 관념으로만 머물고 삶은 여전히 자신의 욕심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본문 7절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경고가 하갈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그 말씀을 전하므로 그 셋이 모두 경고의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하갈이 사라의 핍박을 피해 자기의 고향인 애굽으로 도망을 가던 길에 술 길이라는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의 길을 막고 다시 고난 속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아브라함, 사라, 하갈 모두 조급증에 걸린 사람의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할 때 감찰하시는 주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망가지 말고 거기서 버텨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갈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여호와의 사자는 그 하갈의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어 주십니다. 이스마엘은 ‘고통을 들으시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하갈이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그 샘을 ‘브엘라헤로이’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 계신 분의 우물’이라 이름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며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고 우리를 감찰하시는 주님이 침묵하실 때에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하갈이 역시 조급증에 걸려 자신의 꾀로 위기에 처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로 돌아가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나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셨다. 그분은 나를 쉬지 않고 지켜보시는 분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하갈을 통해 그 가정에 전달이 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바로 우리 교회에게 전하고 싶은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꾀로 우리가 원하는 즉각적인 응답을 얻어내려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실재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시고 우리를 감찰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을 발휘하며 인내 속에서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로 지어가고 계십니다. 지금 당면한 그 어둠이 그 기다림의 시간이 정말 견디기 힘드시거든 ‘브엘라 헤로이’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꾀로 영적인 서자 이스마엘을 낳아버리면 당시에는 유익인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그만큼 길고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십시오. 참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