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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만남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7. 13.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네겝 지역으로 옮겨 가서, 가데스와 수르 사이에서 살았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사람들에게 자기 누이라 소개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려갔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너는 곧 죽는다. 이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 아비멜렉은, 아직 그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 이렇게 아뢰었다. ‘주님, 주님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아브라함이 저에게, 이 여인은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이 여인도 아브라함을 오라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깨끗한 마음으로 떳떳하게 이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네가 깨끗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잘 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지켜서, 네가 나에게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여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그 여인을 남편에게로 돌려보내어라. 그의 남편은 예언자이므로 너에게 탈이 나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너는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너에게 속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다 죽을 줄 알아라.’ (창세기 20:1~7)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 준 것과 다르게, 우리를 또 다시 실망하게 합니다. 본문 속의 아브라함은 마치 ‘바보는 불에 데어 싸맨 손가락을 또다시 불 속에 집어넣어 본다’는 속담처럼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는 죄인들의 말로가 어떻게 처참하게 끝이 나는지를 금방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년이면 약속의 자손 이삭이 사라의 태를 통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도 받아놓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그때 이미 사라의 배 속에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25년전 애굽왕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팔았던 때와 똑같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넘깁니다.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파는 아브라함에게는 명년에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해 약속의 자손을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겼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기 아내 사라를 지켰을 것입니다. 사라가 없으면 그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그저 자신의 안전과 안일만을 챙기고 있는 어리석은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성경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하여 성경의 독자인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일까요?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예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을 하나님 앞에 제시했고 하나님은 13년간 침묵하심으로 그들의 행위를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하나님의 할례 언약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아 너희는 전능한 내 앞에서 너희를 부인하고 나에게 항복하고 순종하라, 그게 너희가 온전케 되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은혜 언약의 핵심 내용을 전제하신 후에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식속들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쪼개짐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들의 몸에 새겨진 흔적처럼 전가될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언약 자손의 탄생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그 자손을 탄생케 하실 수 있음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러한 언약을 받고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인 이삭의 출생에 관한 약속과 그의 출생이 인간적인 조건과 상황 속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임이 반복하여 제시되고 21장에서 드디어 이삭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의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다는 것은 인간적인 불가능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창조가 일어났음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인간됨이나 아브라함이 내어놓은 신앙의 성숙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창조케 됨을 보여 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실수가 이삭의 탄생 바로 앞에 확인 도장처럼 등장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12장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언약들이 아브라함의 파렴치함 속에서 하나하나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막연하게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를 해 줍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무슨 대단한 신앙의 경지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아내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 그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알기 쉽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 후손이 배 속에 들어 있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먹는 믿음의 조상의 실수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가 풀려나고 21장에서 이삭이 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후손도 아브라함의 노력이나 자격, 열심 등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혜나 재능이나 열심 등을 들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일을 하심으로 인간 쪽에서 내어놓는 모든 것들을 기각시키시고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먼지만큼이라도 자신의 자격이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세상의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어떤 실수를 해도 결국은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더라는 방종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토록 보잘것없고, 불가능한 자들에게 은혜로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건져 내시더라는 은혜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이나 열심을 의지하여 자랑하지 말고, 불가능한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권고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과 안일을 위해 두 번씩이나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 심지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사라의 태중에 있었음에도 서슴없이 그랄 왕에게 아내를 주어버린 아브라함의 불가능하고 무력한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은혜로 우리 안에 새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고 홀로 그 창조를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한 전적인 무능력, 즉 전적인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우리 안에서는 자랑이 없어지게 되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영광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닌 망나니에 불과합니다. 그는 21장에서 태어날 이삭이 없으면 열국의 아비도 믿음의 조상도 될 수없는 가련한 티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 은혜로 주어지게 될,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탄생케 하시는 약속의 후손 이삭이 태어나게 되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약속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지옥의 땔감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까지도 수시로 팔아먹을 수 있는 그런 파렴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약속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건져 내셨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해 내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잘못은 아브라함이 했는데 하나님이 아비멜렉을 혼내십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말대로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브라함에게 속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침 일찍 이러나 그 일을 바로잡는 경외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보다 훨씬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부르셨고 아브라함이 기도해야 아비멜렉이 살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도 당신의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실수와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사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명년에 태어날 이삭 때문에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죄의 결과로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죄를 덮어버리는 은혜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주관되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동방 연합군의 뒤를 좇아가 그들을 쳐부수고 롯과 전리품들을 빼앗아오는 두려움 없는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이고, 소돔을 멸하러 가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중보기도를 올리는 중보자로 만들어 낸 것이고, 모리아 산에서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모델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열심과 능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을 낳기 바로 전에 아브라함이 어떠한 자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빠져나오게 만드시고 그 자리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앉혀 놓으셨습니다. 그 사망이라는 비수에 예수가 맞아 죽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생명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며 그 은혜의 구원을 자각하고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교의 삶, 사랑의 삶을 사는 자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