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브라함의 신앙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6. 7.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에게도,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롯은 요단의 온 들판을 가지기로 하고, 동쪽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를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창13:5~18)

 

네겝에서 30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멀쩡했던 삼촌과 조카 사이의 관계가 소유가 많아짐에 의해 분열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 맞은 위기는 기근이었습니다. 물질에 관한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첫 번째 시험에서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크심과 불순종의 결과에 대해 가르치신 후 다시 원위치로 올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근과 정반대의 시험인 풍요의 시험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역시 물질에 관한 훈련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물질로 시험하실까요? 물질이란 그것에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는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시험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물질은 분명 인간에게 유익을 줍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버린 인간은 물질의 도움 없이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성도도 여전히 제한된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쉴 곳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속에서도 재물은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탐심과 의존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반드시 인간의 품위와 인격을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키고 격하시켜 버립니다.

 

물질이 인간을 다스리는 힘은 매우 큽니다. 오죽하면 우리 주님께서도 재물을 하나님과 견주어서 하나님 반대편의 맘몬 신이라고까지 표현을 하시겠습니까?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재물은 복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복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지만 은사는 나 아닌 다른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나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고린도서에서의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성도들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인 물질은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위탁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의 물질관은 나의 만족과 나의 행복에 기여하는 복으로서의 관점이 아닌 그 위탁물을 올바른 곳에 전달함에서 오는 ‘청지기의 만족과 행복’의 은사로서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물질을 나를 자랑하고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이내 하나님 반대편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성도의 신앙생활은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물질에 관한 시험에서 그러한 세상의 힘이 주는 매력과 쾌감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자로 서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의 성숙을 향한 훈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에 유독 물질에 관한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물질은 성도가 버려야 하는 세상 힘의 대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첫 번째 기근 앞에서의 물질의 시험 때와는 달리, 두 번째 물질의 시험에서 롯에게 목초지의 선택권을 양보함으로 더 이상 물욕과 불신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는 아브라함의 멋진 양보의 진술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 삶의 다른 영역에서 어떠한 변화를 보여주는지 본문은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잘 보면 풍요라는 물질의 시험에 멋지게 통과한 아브라함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일취월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질에 대해 자유롭지 못했던 첫 번째 위기 때는 자기 아내 사라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스스럼없이 팔아넘김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시험에서는 그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아주 이타적인 사람으로 성숙되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조카 롯이 알짜배기 땅을 모두 차지하고 나면 자칫 자신의 육축은 아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자기 이외의 다른 이의 유익을 먼저 챙겨주었던 것입니다.(창13:9)

 

이렇게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물질에 대한 훈련이 잘 된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타적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의 힘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의존의 대상으로 서슴없이 택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타인을 밟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물질’‘타인과의 관계’라는 시험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로 설만큼의 성숙함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자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에 더욱 민감해집니다.

 

본문에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살았던 땅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함께 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굳이 모세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은 아세라 목상 등의 우상 신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아브라함과 롯이 살던 곳에 함께 거했다는 기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지금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눈이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과 롯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카 롯과의 땅 가름에 임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신자들이 불화하는 모습을 보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함께 있더라’라는 말씀 바로 뒤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우리 서로 다투지 말고 우리 종들도 서로 다투지 말게 하자’고 갈라짐의 이유를 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불화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카 롯에게 갈라지자 했던 것이고 땅을 가르는 과정에 있어서도 자칫 자신이 기득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롯과 다툼이 생길까봐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만큼 성장한 것입니다. 네겝에서 만난 기근으로 두려워 벌벌 떨며 애굽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던 아브라함, 거기서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마저 팔아버렸던 겁쟁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렇게 두려움 없는 양보와 겸손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애굽의 경험에서 그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은 세계의 왕이라 자타가 공인했던 바로보다 센 분임을 알게 되었고 당신의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난 만큼 그분을 사랑하게 되며 그 전능의 하나님을 아는 만큼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남방 네겝에서 그리고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관해 그리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근과 애굽왕의 권세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힘써 하나님을 알자’(호6:3)라고 거듭 외치는 것이며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호4:1)그들이 그렇게 패역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성경은 끊임없이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고 반복하여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하는 성도들에게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알다’라는 개념은 사물의 실체가 인간의 내적 경험과 섞여서 동화되는 것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신앙여정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에 의거하여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여정의 최종목적지는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