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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인생 여정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5. 2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롬4:18)

 

성경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 자신의 능력으로 바랄 수 없고 믿을 수 없었는데, 그에게 바램과 믿음이 주어졌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였고 아주 풍요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그러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고 그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건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굳이 우상을 섬기고 심지어 그 우상을 만들어 팔던 데라의 아들에게 찾아오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대표로 택해서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나 말을 안 듣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더니 하란에 머물러서 일흔 다섯 살까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보다 더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하란이라는 말 자체가 ‘교차로’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데라가 중도에 머물렀던 하란은 실제로 동쪽으로는 앗수르의 니느웨, 서쪽으로는 헷 족속의 알렙포, 남동쪽으로는 갈대아 우르, 남서쪽으로는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교차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건져 가나안으로 데려가려고 그를 부르셨는데,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보다 더 화려하고 더 타락한 하란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던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달콤함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세상 힘의 달콤함과 우상이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열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건져내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우리 모든 성도의 상태가 바로 그러한 불가능한 상태였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택해지기 전의 배경을 보면, 11장 30절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잉태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고 나옵니다. 생육과 번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당시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저주받은 자의 상징으로 회자될 만큼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28절에는 아브람의 형 하란의 죽음이 나옵니다.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입니다. 32절에는 아버지 데라의 죽음이 나옵니다. 역시 단절입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서 아브람을 부르시는데 ‘어디’라는 장소도 정해주지 않으시고 무작정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백성을 부르심에 있어 철저하게 인간의 이름이 들어갈 여지를 두지 않으시고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아브람의 부르심의 자격이요 원인으로 쓰일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끊어 놓고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해서 구원받은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우리의 불가능함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바벨론을 떠날 것을 지시하셨던 하나님께서 타락한 도시 하란에 안주하려 하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 보면,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로부터 건져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란에서입니다. 따라서 본문 12장 1절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번째 부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보다 더 타락한 도시인 하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빨리 그곳을 떠나라고 또다시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경고가 데라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자 아브라함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분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분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면 어떠한 일이 생기는지를 경험으로 체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의 게으름과 세상에서의 안주를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사용하여 경각심을 갖게 하시며 약속의 땅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75세까지 하란에 머물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끈질긴 인도로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그 땅에 기근이 있어서 아브라함은 곧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나서 ‘복을 줄 테니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던 하나님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을 준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복은커녕 기근이 뭐냐고 투덜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왕에게 팔아먹습니다. 원래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입니다.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이복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왕이 자기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을 염려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그냥 누이라고만 밝히고 애굽 왕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팔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아브라함은 애굽 왕이 자기 아내를 데려가는 대신 많은 가축과 재물과 종들을 주었을 때 그것들을 아무런 가책 없이 덥석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큰 부자가 된 것은 그때부터입니다.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 때 받은 하인중에 한명이 바로 이스마엘의 어머니인 하갈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사라만 팔아먹지 않았어도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예들인 아랍과 이삭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의 길고 지루한 전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걸 믿음이라고 하나요? 하나님께서 잘못한 아브라함은 놔두시고 애굽 왕 바로를 혼내주심으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당시 세계 패권을 쥐고 있던 애굽 왕 바로보다 훨씬 강하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왜 아브라함을 혼내지 않았을까요? 그때는 아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징계를 감당할 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 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실패하고 실수하며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고 가르치며 가나안으로, 모리아 산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세상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렇게 복을 받은 너의 후손이 저 바다의 모래처럼 많고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며 아브라함을 이끌고 가십니다. 거기에 반해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라고 반문하는 행동으로 일관합니다.

 

15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몸에서 날 후손을 주고 그 후손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고 언약하신 후 제물을 쪼개 놓으라고 하시곤 그 쪼개놓은 제물 사이를 홀로 지나가십니다. 창세기 15장의 그 장면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언약 관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두 사람이 언약할 때에 언약 당사자인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잡고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해서, 둘 중 하나가 그 언약을 어기면 어기는 자가 쪼갠 고기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히브리 관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홀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인간은 이 언약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니므로 홀로 지켜 가시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기사를 보면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자로 그려지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 가십니다.

 

그러나 죄 속에 태어난 인간은 절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은 죄인들인 그의 백성들이 약속을 지켜낼 수 없었기에 쪼개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지켜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인,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계속 언약을 어겼으며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애굽 왕에게 자기 처를 팔았을 때 받았던 하갈이라는 애굽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13년간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13년 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혼내주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온전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너는 왜 전능자인 나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하느냐’는 질책인 것입니다. 애굽에서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또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비웃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7~18)

 

이러한 아브라함의 인생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특별함이나 성실함은 없고 정말 엉터리 같은 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열심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열심을 찾아내야지 아브라함을 본받자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의 여정 속에서 가끔 칭찬받을 만한 일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분가를 할 때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합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우상을 섬기고 화려한 문명과 세상의 힘을 좋아하던 아브라함에게서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조카 롯이 잡혀갔을 때에 자기 집에서 기르던 병사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네 나라 연합군과 싸워서 이기고 롯을 구해 옵니다. 애굽 왕이 무서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겁쟁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겁 없이 말도 안 되는 숫자의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여정을 가는 아브라함에게서 문득문득 변화된 모습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곧 그랄 왕 아비멜렉이 무서워 두 번째로 아내를 팔아먹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기적처럼 허락하신 이삭이 자기 아내 뱃속에 들어 있을 때였습니다. 정말 한심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았듯이 그렇게 어느 한 가지 제대로 한 적 없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징계와 교훈과 훈련을 거친 후 백세에 낳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실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 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여정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