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롯은 요단의 온 들판을 가지기로 하고, 동쪽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을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를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 (창13:10~13)
인간이 타락한 후에, 인간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 본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나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땅의 선택권을 주겠다는 삼촌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요단을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그 땅을 물욕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롯이 물이 넉넉한 초장인 그 땅을 여호와의 동산과 같은 땅이라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롯은 요단 들을 가리켜 그냥 여호와의 동산과 같은 땅이라 하지 않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본 땅은 나일 강의 잦은 범람으로 생긴 풍요의 상징인 삼각주 땅에 물이 넘치는 곳이었고 그 도시들은 고도로 발달된 곳이었으며, 바로의 궁궐은 풍요의 절정이었습니다.
삼촌 아브라함과 나그네처럼 통과하여 내려온 가나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멋진 곳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롯에게는 바로 그러한 풍요의 땅 애굽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의 모습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애굽의 화려한 추억은 롯에게 그대로 각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요단의 초원과 소알까지의 도시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 땅이 물이 많고 초목이 우거진 풍요의 땅 애굽처럼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롯이 그러한 좋은 땅을 보자마자 그 땅이 애굽 땅과 같았다고 표현을 한 것은 롯의 관심이 온통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풍요와 사치와 열락의 땅 애굽과 같은 자신만의 작은 애굽 건설에 쏠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이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회가 온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주고 돌보아 준 삼촌이라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자신의 작은 애굽 건설에 필요한 땅을 선택합니다.
삼촌과 그의 육축들이 굶어 죽든 말든 그의 관심은 온통 자기 자신의 작은 애굽 건설이었던 것입니다. 롯은 지금 크게 혼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동산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애굽 땅은 하나님의 임재가 무시된 곳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이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롯의 눈에는 그 둘이 같은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풍요가 있는 곳에 여호와가 함께 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긴 시간을 여행하며 아브라함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의중 또한 읽지 못하던 자였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아무리 오래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중 또한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동산과 애굽 땅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의 신앙생활에서 롯처럼 이렇게 엉뚱한 선택을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신도 곤란을 겪게 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은 롯이 물욕의 눈으로 선택한 그 땅의 대표적인 도시인 소돔을 가리켜 큰 죄인들이 사는 땅이라고 못 박아 이야기합니다. 롯이 물욕에 눈이 어두워 선택한 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극악한 자들이 거하는 멸망의 땅임을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물욕에 어두워 선택한 세상의 화려한 것들은 죄가 양산해 놓은 더럽고 추악한 것들에 불과합니다. 롯은 동으로 장막을 옮겨가며 결국 가장 악한 땅 소돔에 정착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물욕에서 비롯된 성도의 선택은 결국 죄악의 한 복판으로 달려가는 저주의 달음질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장막을 걷으며 순종의 산 모리아 산으로 행진을 한 것에 비교하여 롯은 장막을 걷으며 기어이 그 저주의 땅, 쾌락의 땅, 소돔 땅으로 입성을 합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장막을 옮긴 것이 아니라 세속적 판단에 의한 물질적 성공의 전망에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계십니까? 모리아 산입니까? 아니면 물욕을 채워주는 소돔입니까?
롯은 그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아주 고통스러운 결국을 맞게 됩니다. 창세기 19장에 롯은 풍요하고 화려하나 하나님의 면전에서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 멸망의 땅 소돔의 장로가 됩니다.
그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 성의 장로로서 그 소돔 성 사람들의 법관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시대에는 성문에서 백성들의 재판이나 민원사항을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롯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롯이 죄인 중의 괴수 노릇을 하고 있는 꼴입니다. 성도가 성도간의 교제를 떠나 홀로 죄악 된 세상에 놓이게 되면 그는 반드시 신앙생활의 맥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죄라는 것에 둔감해지게 되고 곧 자기가 토해 놓은 토사물에 뒹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을 하면서 ‘내 배우자를 반드시 전도하고야 말겠다고’ 호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이나 그가 한 말에 책임 있는 행동을 하던가요?
대부분 믿지 않는 배우자의 생활양식 속으로 오히려 끌려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고리타분한 신앙생활보다 화끈한 불신 세계가 더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장사가 없습니다.
그렇게 롯은 소돔 사람들을 가리켜 ‘형제여’라고 부를 만큼 소돔 백성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택한 애굽 같은 땅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에 모두 불타버리고 맙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위들을 모두 잃고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소돔 땅에서 누리던 부와 쾌락과 배우자까지 몽땅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이 세상 것들의 정체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성애와 문란한 성생활이 아주 자연스러웠던 소돔에서 자란 두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 모압과 암몬이라는 자식을 낳아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 즉 불신자들의 조상이 됩니다.
그렇게 근친상간에서 비롯된 모압과 암몬은 대대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 동쪽의 요르단의 수도가 암만입니다. 그들이 바로 암몬의 후예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물욕적 세계관에 의해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한 성도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패망의 자리로 자신을 몰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롯은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 차지한 듯 보였지만 결국에는 동굴에서 술에 취해 자기 딸들과 근친상간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입성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천국 가족이 중도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여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의 손을 꼭 잡아 주십시오.
우리의 생애에서 아직도 롯이 우리 생애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면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 삶은 고통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욕적 관점에서 세속의 요단 들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내 쾌락의 땅, 그러나 멸망의 땅 소돔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얼른 육의 눈을 감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축의 살을 찌우게 할 수 있는 푸른 초장은 아닐지라도 영혼을 살찌우고 영혼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하늘의 초원을 선택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