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주님께 가까이 가서 아뢰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시렵니까? 그 성안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 성을 기어이 쓸어 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그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의인을 악인과 똑같이 보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에서 내가 의인 쉰 명만을 찾을 수 있으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그 성 전체를 용서하겠다.’ 아브라함이 다시 아뢰었다. ‘티끌이나 재밖에 안 되는 주제에,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의인이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섯이 모자란다고, 성 전체를 다 멸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거기에서 마흔다섯 명만 찾아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다시 한 번 주님께 아뢰었다. ‘거기에서 마흔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서른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거기에서 서른 명만 찾아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다시 아뢰었다. ‘감히 주님께 아룁니다. 거기에서 스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스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신 뒤에 곧 가시고,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창18:23~33)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하여 롯이 살아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면서 쪼개진 제물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언약 의식을 치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이스마엘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3년간의 침묵으로 아브라함에게 불편한 심기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13년 만에 다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기 부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렇게 하나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쪼개짐이 어떠한 것인지 실물교재를 통해 가르치는데 그게 할례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쪼개짐이 전가된 자들은 그 몸에 쪼개짐의 흔적을 갖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을 이미 쪼개져 죽은 자들로 간주해 주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듭난 자들이 추구해야 하고 도달해야 하는 삶의 목적지 중 하나는 나그네 대접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자들이 두 번째로 추구해야 하고 도달해야 하는 삶의 목적지는 나의 목숨을 걸고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의 삶을 사는 것임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고 배웅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배웅 나온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과 그들의 심판에 대해 언급을 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막아서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것으로 본문이 끝이 납니다.
사실 본문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멸망 당해야 하는 세상을 품어 안고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의 기도를 올리는 예수님의 중보사역을 그림자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중보자들로 새롭게 태어난 성도들의 신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타락과 죄악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로 심판의 불을 들고 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길을 막아서서 그곳에 있는 의인들을 생각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해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고 있던 롯이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 그 곳에서 건져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롯의 구출사건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넓은 들이 있는 땅을 내려다보니, 거기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마치 옹기 가마에서 나는 연기와 같았다. 하나님은 들에 있는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살던 그 성들을 재앙으로 뒤엎으실 때에, 롯을 그 재앙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 (창19:28~29)
롯은 쾌락과 화려함의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포기하기 싫어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손목을 잡고 끌고 나오기 전까지 그곳에서 버텼던 사람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두 눈으로 목격을 하고도 술에 취해 두 딸과 근친상간을 하여 아이를 낳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택하여 생명의 은인인 삼촌을 버리고 롯이 택한 소돔에서 두 딸이 배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과 쾌락만이 가치와 만족의 척도가 되는 타락의 도시 소돔에서 롯의 두 딸들이 근친상간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지경까지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이, 세상이 가치 있다고 정해 놓은 많은 것들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만족하게 해주고, 가치 있는 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여전히 물질과 쾌락의 노예였던 롯이 의인 아브라함의 기도에 의해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롯을 가리켜 의인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사람 롯은 구하여 내셨습니다.” (벧후2:7)
롯은 소돔 성의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를 의로운 자라고 부릅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의로운 자를 악한 자와 함께 벌하시는 것이 가하냐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거기 있는 의인들은 모두 살려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멸망 받는 악인들 속에서 건져진 롯은 의인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롯이 소돔 성에서 빠져나오게 된 이유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롯이 의인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소돔 성에서 빠져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브라함의 중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은 그 자신의 노력이나 됨됨이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중보에 의해 의인이 되어 멸망에서 건져진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말미암는 것이지 선택되지도 않은 사람이 어떤 사람의 기도 때문에 의인이 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의 중보에 의해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본문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원형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본문은 그렇게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에서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의해 의인이 된 사건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자로 서신 예수 그리스도와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성도들이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분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예수들로 재탄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그의 인생 속에서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보자가 된 자신의 신분을 명확하게 이해한 사람만이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중보기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2:5)
사람을 위한 중보는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한 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예수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중보자의 삶과 중보자의 기도를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게 된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 기도가 능력이 있어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동역자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중보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창조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할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러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자의 자격에 대해서도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본문 17절부터 21절까지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과 그 땅에 대한 심판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것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어떤 비밀도 없는 친한 친구가 된 사람들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약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로 대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성도 모두를 당신의 친구로 대접해 주십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요15:13~14)
이렇게 하나님의 비밀스런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바로 모두 하나님의 친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친구들에게만 하늘의 비밀을 알리십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배웅 자리에서 친구인 아브라함에게만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친구들만이 하나님의 의중을 알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감히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친구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당신의 비밀을 알리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자각한 사람만이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성경 말씀이 마치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는 것처럼 들리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그 간절한 기도에 의해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롯이 의인이 되어 소돔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지 않았으면 롯이 구원받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해 롯을 구하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반드시 그렇게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며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신다는 구속사의 성취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