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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출격 전쟁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6. 12.

아브라함의 출격 모습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사로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갔다. 그 날밤에 그는 자기의 사병들을 몇 패로 나누어서 공격하게 하였다. 그는 적들을 쳐부수고, 다마스쿠스 북쪽 호바까지 뒤쫓았다. 그는 모든 재물을 되찾고, 그의 조카 롯과 롯의 재산도 되찾았으며,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되찾았다." (창14:14~16)

 

아브라함이 기근의 시험과 풍요의 시험을 마치고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올라갔다가 거기서 단을 쌓고 다시 헤브론 지역으로 내려와 그의 가솔들과 함께 남방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세 번째 시험을 치릅니다.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애굽 땅처럼 좋은 땅을 차지하고 떠나버린 조카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동방 연합군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그 전쟁의 기원은 이러합니다. 원래 이 일이 발생하기 14년 전에 엘람의 그돌라오멜 왕이 원정을 하여 서방 사해일대를 정벌하고, 그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하여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서방의 다섯 나라는 12년 동안은 열심히 조공을 바치며 살았는데 제13년에 갑자기 배반하여 조공을 끊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14년째 되는 해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자신과 동맹을 맺고 있던 동방의 세 나라와 연합을 하여 다시 서방 정벌에 나선 것입니다. 그때 소돔과 고모라도 그 원정군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그 동방의 원정군은 오늘날 이란 지방에 해당하는 큰 나라 엘람과 후대에 바벨론이라 불렸던 대제국 시날,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풍요의 나라 엘라살, 티그리스로부터 메디아 국경까지 너른 지경을 소유하고 있던, 후대에 앗수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고임, 이렇게 네 나라의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위세가 어떠했겠습니까?

 

그 동방의 원정대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타인 중부의 여러 족속을 치면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들은 먼저 갈릴리 동쪽 바산 땅의 아스드롯 가르나임을 쳤습니다. 그곳에는 르바 족속이라는 거인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 르바 족속은 매우 잔인하고 강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부 거인들이었으니 얼마나 강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엄청난 원정대의 서슬 앞에서 그 거인족들도 맥을 못 추고 정벌 당하고 말았습니다. 동방 원정대는 갈릴리 바다 동쪽을 훑으면서 내려와서 사해 동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공격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는 가나안 땅에서 줄곧 장막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공격에서 제외되었던 것입니다. 원정대에게 천막은 먹이감으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방의 원정대는 가나안 땅 동부를 모두 점령하고 사해 서쪽까지 점령을 한 후에 마지막으로 반역을 한 다섯 왕들을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던 소돔과 고모라와 스보임, 아드마, 소알의 왕들은 역청 구덩이 앞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워 보았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 역청 구덩이에 자신들이 빠질 정도로 혼비백산했습니다. 거인족들을 비롯한 가나안의 수많은 왕들과 나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돌라오멜의 동방 원정군의 뒤를 자신의 집 가신들 삼백여명을 데리고 좇아갔습니다.

 

한 마디로 동방 원정군을 향한 아브라함의 출격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백 열여덟 명의 가신들과 자기가 빌붙어 살고 있던 헤브론 땅의 아모리 족속, 마므레 삼형제의 부족, 즉 마므레와 에스골과 아넬 족속으로부터 소수의 동맹군을 얻어 황급히 출병을 했습니다.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가나안 땅 전체를 점령하고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들을 이끌고 승전가를 부르며 돌아가는 막강한 동방 원정군입니다. 이 장면에서 성경 사사기의 한 장면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 수가 메뚜기 떼처럼 무수히 많았다고 하는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연합군을 향해 삼백 명의 군사와 함께 출정을 했던 기드온이 생각날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군대가 처음에는 삼만 이천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 돌려보내시고 삼백 명만 남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치르는 전쟁은 그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의해 승패가 갈린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지금 아브라함이 가신들 삼백여명과 출격하여 동방의 원정대와 치르는 전쟁은 아브라함의 지략과 능력에 의해 승패가 갈리는 전쟁이 아닌 하나님의 전쟁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대적들과 치르시는 전쟁은 어떤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과의 싸움에서 하나님 백성들 편을 들어서 세상에서 늘 승승장구하게 만들어 주는 싸움일까요? 그건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과 싸워서 져주라고 하셨지, 어떻게 해서든 이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싸움은 어떤 싸움이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늘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 바로 성도가 신앙생활 내내 치러야 하는 영적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의 동방 원정군과의 전쟁에서 물리적이고 세상적인 보상을 받았나요? 아브라함은 그 전쟁을 통하여 세상적인 보상이나 물리적 결과를 조금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서방 정벌에 나섰던 동방 연합군들이 아브라함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겨 다시 회군하여 아브라함을 좇아 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우습게 여기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던 다섯 나라를 혼내주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몇 명 안 되는 적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위신을 완전히 땅에 처박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출격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신앙 여정에서 겪게 될 보편적 영적 전쟁의 내용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6:12)

 

바로 이 전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영적인 싸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싸움입니까? 골로새서에 가면 에베소서에서 우리의 대적으로 제시된 정사와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완전히 패배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2:14~15)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대적인 사탄의 권세를 짓밟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벌이고 있는 영적인 전쟁은 십자가에서 이미 결판이 나 있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 성도는 그 영적인 싸움을 자신의 신앙 여정 동안에 열심히 싸워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이미 이겨 놓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는 너희가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주님과 사단과의 전쟁은 이미 십자가에서 결판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을 재현하며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군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승패는 이미 갈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영적 전쟁은 늘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인 것입니다. 이미 승리로 결정지어진 싸움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의 영적전쟁에서 실수할 수도 있고 패배하는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조차도 영원한 승리를 향한 거름 역할을 하는 것이 성도의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로 가서 그 전쟁의 가시적 결말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15:24~26)

 

우리의 영적 싸움의 대상은 정사와 권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우리의 대적 정사와 권세가 모두 멸해지게 되는데 그중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정사와 권세의 대장을 가리켜 사망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싸워야 하는 전쟁은 사망으로 대표되는 어떤 영적 세력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사망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 뚫고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싸워야 할 대상은 사망, 즉 죄의 세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그 사망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삼켜져 버렸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4~57)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바로 그 사망을 이김으로 삼켜 버리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이기심에 연합되어 우리도 이긴 자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사망이 우리의 사망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

 

본문의 아브라함의 전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의 전쟁에서 아브라함과 삼백 가신들은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요?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삼백 가신들은 그들이 치른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승리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혀 무능력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승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실현이 된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보잘것없는 출격은 바로 그 십자가 전쟁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들의 전쟁은 모두 하나님이 왕이시고 우리는 티끌인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전쟁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본문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롯이 동방의 원정군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상당히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롯이 떠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위로해 줍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롯의 배신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괘씸한 조카 롯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불러야 할 일이 아닐까요? 게다가 그를 사로잡아 간 군대는 막강한 동방 4개국의 연합군입니다. 자신에게는 삼백여명의 가신들과 같은 동네에 사는 마므레 삼형제 부족들의 소소한 지원군 뿐입니다.

 

게다가 원정군들은 이미 직선거리로 230km나 되는 단까지 철수해 있는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병과 보병들을 거느리고 230km를 좇아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일주일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래저래 아브라함에게는 힘겹고 손해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 원정군의 손에 하나님의 백성 롯이 잡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괘씸한 롯을 위해 여러모로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출격을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삶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므로 그 전쟁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는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원수 같은 롯을 구하러 출격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치러내야 할 전쟁들이 자기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의 말에 자신의 전리품 십분의 일을 바친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멜기세덱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초를 치는 말을 합니다.

 

네 전쟁은 너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전쟁이었다고 그 전쟁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전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자기가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모든 공로와 공적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세 번째 시험에서도 보기 좋게 합격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똑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단의 세력이고 그러한 죄의 세력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아니 매 순간 아브라함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전쟁에 임하여야 할까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겨 놓으신 전쟁이기에 때론 감당할 수 없게 보이는 우리의 죄 성을 향해 과감히 출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이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동방원정대 앞에 선 아브라함과 가신 삼백열여덟 명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우리는 전략과 전술을 동원해서 열심히 싸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겠지 하고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알았지만 무작정, 무모하게 달려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소수 정예의 군사들로 많은 수의 적군을 상대해야 했기에 그들을 나누고 밤을 타서 그들의 후미를 공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모을 수 있는 동맹군을 모두 모아서 출격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무모함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행위처럼 우리의 최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미 우리 죄를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때론 우린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라는 결과를 못 박아 놓고 싸우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전에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패배 또한 승리를 향한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전쟁입니다.

 

결국 우리는 승리의 고지로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확고한 구원의 최종성과 확실성을 우리가 정말 믿고 있다면 우리는 간혹 실수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그 싸움을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영적 전쟁을 잘 치러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유일한 공격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