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와 세운 언약을 잘 지켜야 하고, 네 뒤에 오는 네 자손도 대대로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너와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나의 언약, 곧 너희가 모두 지켜야 할 언약이다. 너희는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게 하여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이다. 대대로 너희 가운데서, 남자는 모두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의 집에서 태어난 종들과 너희가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비록 너희의 자손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집에서 태어난 종과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나의 언약이 너희 몸에 영원한 언약으로 새겨질 것이다.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양피를 베지 않은 남자는 나의 언약을 깨뜨린 자이니, 그는 나의 백성에게서 끊어진다. 바로 그 날에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종과, 돈을 주고 사온 모든 종, 곧 자기 집안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은 것은, 그의 나이 아흔아홉 살 때이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받은 것은, 이스마엘의 나이 열세 살 때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같은 날, 할례를 받았다. 집에서 태어난 종과, 외국인에게서 돈을 주고 사온 종과,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가 아브라함과 함께 할례를 받았다. (창17:9~14, 23~27)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시고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역사와 시간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본문인 창세기 17장에는 ‘내가’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구원은 하나님 홀로 완성해 내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어 하나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므로 너희들은 자꾸 너희의 힘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쌓아 행복에 이르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은 ‘모든 것을 기르시고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또다시 육신의 열매를 내어놓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은 내 능력으로 내가 탄생케 한다, 그러니 너는 나의 능력에 의지하라’는 믿음의 촉구를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하게 되는 길은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후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이라는 말은 우리의 힘으로 생산해 내는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약한 자로 자기를 부인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시고 완성해 내시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뒷짐 지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는 반드시 그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의 반응이 수반됩니다. 본문 9절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내려주시고는 아브라함에게 ‘지키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구원은 절대 중도에 포기되지 못합니다. 그걸 신학에서는 ‘견인’이라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이들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실천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17)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행함은 구원의 원인으로서의 행함도 아니고 구원이라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행함도 아닙니다. 성도의 행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라는 관계로 발생하는 아버지와 자식 간의 사랑의 표현이고 독생하신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대우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믿음과 신뢰와 애정과 은혜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증거로서의 행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서 그 사랑의 반응, 감사의 행함을 이끌어 내십니다. 그러한 언약에 있어서의 믿음과 실천의 양 날개는 하나님의 이름 바꿔주심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 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의 이름을 아브람(높으신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 사래는 ‘나의 왕비, 조롱’이라는 뜻이고 사라는 그냥 ‘왕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라는 이제 자식이 없어 조롱받던 일개 족장인 아브라함의 아내에서 열국의 어미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을 주는 것은 이름을 주는 자가 이름을 받는 자를 소유한다는 소유권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 이름에 담긴 약속과 능력을 상대방에게 선물한다는 의미가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새 이름을 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 소유의 백성이라는 것을 밝히심과 동시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약속의 성취를 그들의 삶 속에서 당신의 힘으로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하시고는 그 언약을 지키는 표시로 할례를 명하시는 것도 역시 믿음과 행함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는 명령이었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끝을 조금 자름으로써, 즉 전인적인 죽음으로 나와 내 후손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생명, 즉 영생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말미암는다는 것을 우리는 할례의식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참 행복은 오직 영생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데 그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의 행위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력이나 효험이 없는 것입니다.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할례가 우리의 할례가 되어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의 결과물이 우리에게 거저 전가되는 것을 믿는 마음의 할례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조차 할례는 마음의 할례임을 여러 곳에서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행위를 낳는지가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
모세는 마음의 할례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열매를 필연적으로 산출하게 됨을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똑같은 말을 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마음의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2:11)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육적 몸을 벗는 삶을 사는 삶을 목적지로 하여 그들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반드시 실천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언약을 지키라’고 하시고는 그 언약을 지키는 표시로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육적 몸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자로 재탄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무리라는 새 이름을 받은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할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가 생산에 의한 육의 서자들을 모두 몰아내고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분이 사신 십자가의 삶을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례를 지키는 실천적 삶의 내용은 아브라함이 나중에 그 육의 서자인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식 하나 없었던 노인 아브라함이 86세에 얻은 자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게 바로 할례입니다.
그건 고통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내가 나의 인생 속에 낳아놓은 습관, 성품, 집착, 중독 이러한 것들을 끊어내는 것은 살을 베어내고 뼈를 깎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쫓아내야 합니다. 그게 자기의 육욕의 서자를 끊어내는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할례받은 이후의 자식만 진짜 언약의 자식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후에 나오는 열매들과 여전히 우리의 힘을 의지하고 우리의 지혜를 의지하여 내어놓는 열매들은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후에 화장실 갈 때마다 그 할례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나의 육적 서자로는 절대 언약의 후손을 만들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나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하늘의 삶인 영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약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나의 삶 속에서 자유롭게 나를 지어가실 수 있도록 결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전역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두 부자가 있었습니다. 65세의 아버지와 39세의 아들 부자입니다. 아들은 태어나면서 뇌성마비 환자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컴퓨터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아들은 ‘뛰어, 뛰어보고 싶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아버지는 그 길로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마라톤 경주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보스톤 마라톤을 64번이나 완주했습니다. 아들은 철인 삼종 경기에도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수영조차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때부터 수영을 배우고 자전거를 익혀 아들을 보트에 태우고 끈으로 자기 허리에 묶은 뒤 철인 삼종 경기에 참여했습니다.
그 뇌성마비 환자인 아들의 뒤에는 언제나 아버지가 있었기에 그가 마라톤과 철인 삼종 경기를 완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그 아버지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그 경기의 승자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내 뒤에서 달리지 않았다면 난 절대 이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내 아들이 내 앞에 없었다면 난 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달리시고 우리는 뒤에서 미시는 아버지가 계시기에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분이 지키시고 그분이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목표지점만 또렷이 바라보며 뒤에서 미시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고 용서하라 하면 용서하십시오. 그 아들이 철인 삼종 경기를 마치고 수상 소감을 이렇게 썼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