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세기 12장 10~20절)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로,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남방으로 해서 가나안 땅을 통과하여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남방 네겝 지역에 이르렀을 때 젖과 꿀이 흘러야 하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풍요와 다산이 아닌 기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방 네겝의 기근을 통해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의 허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기근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인 아브라함에게 풍요와 다산의 신의 허구성을 알리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이 땅의 풍요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기근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백성으로의 성숙을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한 하나님의 깊은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기근은 당황스럽고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만나자 즉시 순종과 헌신의 단쌓기를 중지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근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좇아 들어온 땅에서 웬 기근입니까? 아브라함은 그가 지나는 곳마다 순종과 헌신의 단을 쌓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탈한 기근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망스러운 마음에서 단 쌓는 것을 멈춥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이런 곳으로 몰고 오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기대하고 이방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풍요와 다산의 땅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남방 네겝의 기근을 피해 나일 강의 삼각주 땅인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애굽은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땅의 것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삼으려 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마음대로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의 인생을 통하여 그들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에 기근을 내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믿음을 공고히 다지고 그들로 하여금 기근의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살 수 있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성숙을 도모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고향 땅이 뭔가 다른 장소라서가 아니라 그곳에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인 것처럼 약속의 땅은 풍요와 다산의 땅이 아니라 아버지가 계신 땅이 바로 약속의 땅,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아버지 한 분 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진짜 자식들로 만들어 내기 위해 때로 그들의 삶 속에 아버지 이외의 것들을 기근으로 말려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입니다. 그때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에 기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중을 묻고 그 뜻에 맞게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십년 동안에 이스라엘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낮추시며 시험하사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8:2)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고 그 길에서 그를 낮추시고 시험하시는 것은 그렇게 낮추어진 상태에서도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지 아닌지를 알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남방 네겝에서의 기근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진일보시키려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있는 은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기근 앞에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남방 네겝에서 아브라함에게 기적 같은 풍요나 기적 같은 승리를 주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 ‘너 이래도 나의 말을 듣고 좇을래?’하고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도 이러한 기근과 위협이 닥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남방 네겝의 시험이 분명 닥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이외의 다른 방법을 찾아 애굽으로 슬그머니 내려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러한 기근과 갈증과 위협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신뢰하며 믿음을 발휘하시겠습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것은 믿음의 질을 재는 시금석인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그의 인생의 기근이나 갈증이나 세상으로부터의 위협이나 모함과 같은 것들은 비록 당시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러한 고통들은 성도의 신앙 성숙에 반드시 유익이 됩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굳게 세우고 강하게 해주는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남방 네겝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속내를 읽어내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결핍을 채우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마음에 이미 불신과 그로 인한 세상을 향한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 애굽 사회에는 힘 있는 집의 가장이 다른 집 처자가 마음에 들면 그의 힘을 이용하여 그 처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당시 애굽의 관습이었습니다. 만일 그 여자가 남편이 있는 여자이면 보복을 피하기 위해 그 남편을 죽이고 그 여자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내려가자마자 대뜸 그 걱정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꾀로 애굽 행을 결정한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두려움이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났고 사라는 그보다 열 살 아래였으므로 사라의 나이가 적어도 65세 이상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미모가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곧바로 애굽 왕 바로에게 보고가 되었을 정도였습니다. 바로라는 말은 ‘큰 집’이라는 뜻입니다.
애굽에서 가장 큰 집의 주인인 바로가 사라를 탐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파는 쪽을 택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꾀로 스스로를 보호하려 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의 수치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자신의 손해로 이웃이 득을 보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대가 애굽 사람들에게 나의 누이라고 하면 내 목숨이 안전하고 보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은 ‘자기 목숨에 관한 모든 일이 자기 생각대로 잘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자신의 아내가 애굽 남자와 동침하는 것이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미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내 아내의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지금 천하에 비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순종의 단, 투신의 단, 헌신의 단을 쌓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쉽게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여전히 그 속에 옛사람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신 안에 심겨진 생명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에 게을러질 때 인생의 기근을 만나게 되면 이내 그는 자기 안의 옛 사람에 대한 연정을 드러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자기에게 위기가 닥치자 자신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옛 사람에 대한 연정을 그대로 노출시켜 버린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의 희생을 불사하는 그런 옛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안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실수까지도 선용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불신과 그로 인한 두려움에 의해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애굽으로 내려가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내를 판 사건은 분명 파렴치한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왕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애굽왕 바로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속아서 나이가 65세도 넘은 여자를 많은 지참금을 주고 배필로 맞은 바로는 엄밀히 말하면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를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어떤 재앙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세계의 왕임을 자처했던 바로가 혼비백산해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놓아준 것을 보면 하나님께 크게 맞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을 통해 자신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도 벌벌 떨게 하는 크신 분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확인되자 얼른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실수조차도 선용하셔서 그의 성숙에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그의 수중에는 많은 가축과 은금이 풍부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복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꾀로 만사형통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왕에게서 받은 그 물질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불신앙과 파렴치함을 반추했을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불의한 재물은 복이 아니라 수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애굽 행과 그곳에서의 부끄러운 행동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가르쳤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가르침으로 보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허락하는 기근과 그 기근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우리의 연약함까지도 선용하셔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것들을 몰아내는 데에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경험 속에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믿는 것을 여전히 내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거기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이 벧엘로 다시 ‘올라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뼈저린 참회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의 실패와 실수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무력하고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구원이란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들이 한 명 한 명 사형이 집행되는 가운데, 그 두려움 속에서 사면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내 말을 거역하면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죄인들이 하나하나 죽기 시작했습니다.(창5)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사면해주신 그 분이 ‘내가 네 죄를 용서해서 살려줬으니 이제 내 말을 잘 들어’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복음을 정말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면, 자신이 어떠한 지경에서 건져진 사람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가 어떠한 결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라가 바로의 아내가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 깨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약속의 후손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파렴치한 죄를 지었음에도 약속의 후손 때문에 건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반드시 성숙시키고 완성시켜내셔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참 언약의 후손이신 예수 때문에 살아나고 예수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이 온 무리들과 그의 모든 소유를 다 가지고 나가라고 합니다. 자기가 준 것까지 모두 가지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 같은 치사한 인간의 손때가 묻은 것은 더럽고 치사하고 재수 없는 것으로 간주를 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제 목숨만을 위해 이 세상을 살 때, 세상은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의 하나님을 모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패와 실수의 자리에서 그렇게 유약하고 치사하고 이기적인 아브라함이 벧엘과 아이 사이로 다시 올라간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창13:3)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고 아이는 쓰레기 더미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그 사이에서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든지 쓰레기 속으로 쳐박힐 수도 있지만, 그 쓰레기 더미들을 벧엘로 삼켜버리는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우리가 내린 답에 의해 우리의 손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마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