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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원리2 - 영은 믿는 것이고, 혼은 이해하는 것이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6. 11.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13절)
 
고린도전서 1장 21절은 ‘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 몸은 ‘이 땅’에 속했습니다.
 
지혜는 이 땅의 것을 이해하는 기능이지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성(혼)으로 영적인 것을 모두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적인 것은 혼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의 원리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혼의 기능이 전혀 소용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초지성적인 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혜, 우리 혼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말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믿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이해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란 인생을 혼의 생각으로 풀어 가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내 생각과 내 능력으로 인생을 헤쳐 가려는 사람, 그렇게 헤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 이 사람이 ‘지혜 있는 자’인 것입니다.
 
‘혼’을 강화시키는 것이 있고 ‘영’을 강화시키는 것이 있는데 ‘사람의 지혜’는 당연히 혼(육)을 강화시킵니다.
 
지혜는 ‘보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능’, 즉 혼과 육에 속한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기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영이 아니라 혼이 강화됩니다.
 
그렇다면 영을 강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인생을 사람의 지혜로 살아가려 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영이 활성화되고 강해집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가 이야기하는 두 번째 영적 원리입니다.
 
특별히 ‘사람의 지혜’‘믿음’이 첨예하게 대립될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허튼 실수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러시지? 하며 이해 안되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혼과 영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혼이 이야기합니다. ‘이건 뭐지? 하나님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가 있지?’하고 ‘왜’를 묻기 시작합니다. 혼의 기능입니다. 혼은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하며 시험에 들고 영적으로 침체가 됩니다. 왜 영적으로 침체가 되는 것일까요? 혼(과 육)을 강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려는 혼의 욕구,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이 혼의 욕구를 추구할 때, 우리 안에 영이 아니라 혼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 혼과 대립되는 영의 반응이 있습니다. 영은 ‘왜’를 묻지 않습니다. 이해하려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영은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발휘될 때, 우리 영이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믿음은 영의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이 성장하고 강해지는 ‘영적 성장’은 대부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모든 것이 다 완벽한한 상활 속에서는 믿음이 발휘될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이해하면 되는데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 혼의 기능으로는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순간이 이를 때, 여기서 비로소 우리 영이 믿음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 혼의 작동이 멈추는 그곳, 거기서 비로소 우리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발휘될 때 비로소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믿음으로 통과할 때, 만들어집니다.
 
사람에게 영적 권위는 억울한 일을 묵묵히 통과할 때 부어집니다. 영적 권위가 부어지는 것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단순히 성경 지식이 많다고 권위가 부어지지 않습니다. 단순히 신학 공부했다고 영적 권위가 부어지지 않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언제 영적 권위가 부어지는가? 억울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일, 이 상황 속에서 묵묵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영처럼 아무 불평도 없이, 아무 원망도 없이 그저 묵묵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완전하심을 의지하며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통과할 때 위로부터 권위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권위를 얻으셨습니다.
 
혹시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묵묵히 통과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권위를 부여하려고 계신 것입니다. 영적인 원리를 따라 살아 갈 때 영적인 삶인, 질서와 평안과 안식과 기쁨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한 일상, ‘불의한 일상’을 사용하셔서 당신을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 이해하고, 다 해결되는 인생에는 영적인 상급이 없습니다. 영적인 권위는 억울한 일을 묵묵히 통과할 때,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를 때, 시험에 들지 않고 한결같이 그 자리, 예배의 자리를 지킬 때, 거기서 영적인 권위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 저서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공간’ (저자:고성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