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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꺾어지지 아니한 뼈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4. 9.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 19:31~37)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서 시체를 치워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다음날이 유월절 안식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거룩한 큰 날에 죽은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을 것을 요구한 것은 당시 사형수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관습에 의한 것으로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 군병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다리를 쇠몽치나 쇠몽둥이를 갖고 십자가 아래로 가서 그 사람들의 무릎을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혹시 그 죄수가 살아 있으면 이제 무릎이 꺾이니까 무릎으로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고 그 결과 횡격막이 막혀서 질식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와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대신 한 군병이 와서 다리를 꺾지 않고, 옆구리를 찔러서 피와 물이 쏟아집니다. 왜, 이런 내용들이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먼저 본문의 내용만을 두고 볼 때에 선뜻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군병들이 예수님의 다리만 안꺾었냐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군병들이 예수님이 죽은 것을 알고 그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다리를 꺾는 것은 죽지 않은 죄인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미 죽은 죄인의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이건 죽은 거다'라는 확인 작업이 무릎을 꺾는 거였습니다. 그러므로 군병들은 죄수들의 사망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죄수들의 다리를 다 꺾어야 되는데, 예수님의 다리만 꺾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하나 이상한 건 예수님의 옆구리만 창으로 찔렀습니다.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면 같이 달린 강도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는 것이 옳은데 예수님의 옆구리만 찔렀습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본문 36절과 37절 보면,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이렇게 성경 말씀대로 그대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뼈를 꺾이지 않게 하셨고 옆구리를 찔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그러한 내용 속에는 분명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것인데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부분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는다'라는 내용은 시편 34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편 34:19~20)

이 말씀대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은 사건이 예수님의 어떤 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의인됨' 을 보여주기 위해 다리, 즉 뼈를 꺾지 않은 것입니다. 시편 34편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보호하시고 건지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뼈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뼈가 절대 꺾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전부 뼈가 꺾여야 되는 것이고, 딱 한 분만 뼈가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은 사건은 이 세상에 유일한 의인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라는 것, 그것과 그러한 의인이 세상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진술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십자가 위에서 의인으로 증명되는 어떤 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뼈가 꺾이지 않은 의인이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통하여 죽어야 할 자들을 세상에서 건지게 되는 완벽한 모형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 보면,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의 유월절에 관해서 지시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희생에 의해 죽음의 유월, 죽음이 그냥 넘어가는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 어린 양은 뼈가 꺾이지 않은 어린 양이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뼈가 꺾이면 안된다고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에도 똑같은 지시가 나옵니다. 민수기 9장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든지 할지라도 다 여호와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이월 십 사일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꺽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율법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뼈가 꺾이면 안 됩니다. 뼈가 꺾인다는 것의 의미가 더러운 것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예수님의 뼈는 꺾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유일한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다른 곳으로 가면 조금 상반된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뼈가 꺾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7~8절 보면,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게 한 뒤에 나단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지적받은 뒤에 지은 시편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자신의 죄인된 실체를 낱낱이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밧세바를 범하기 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예 자기는 모태에서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길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니,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시편을 보면 '나를 깨끗케 하소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분명히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는 확신이 그 시편에 들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의 본질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51편 2~4절 보면,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그 시편을 쓸 때 쯤에는 자기 앞에는 자기 목전에는 늘 자기 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단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 다웟은 율법을 들어서 그놈은 죽여야 된다고 이야기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네 배로 물어줘야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율법은 항상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데 쓰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하나님께만 범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럼 밧세바나 우리아는 뭐가 됩니까. 정작 피해자는 밧세바와 우리아 아닙니까?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만 범죄를 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유일한 피해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가해자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는데, 악당들한테 피해보는 사람도 가해자란 말인가요?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죽인 가해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인간은 원래 죽은 흙이기 때문에 피해를 입을 게 없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간들은 다 가해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건,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인간들의 판단으로 규정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통용되는 개념인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죄라는 개념이 통용이 안되는 것입니다. 원래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만 통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인간 자신의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행위만을 죄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가리켜 죄의 증상이라고 이야기를 하지, 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죄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걸 죄라고 하며 그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유일한 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 중에 저건 진짜 죄라고 단정하여 규정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예수 안 믿은 것이고 그걸 '성령훼방죄' 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예수 안 믿는 게 '성령훼방죄'이고 그것만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나'라는 존재의 그 무가치함과 그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나의 힘과 노력으로는 절대 구원에도 행복에도 안식에도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만이 '나'라는 존재 기반이며, 구원의 근거임을 인정하는 행위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건 여전히 '나'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붙드는 행위이므로 그걸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들이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으로 규정해 놓은, 어떤 범주를 벗어나는 것만을 죄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어기면 감옥에 가고 지키면 상을 받는, 그런 인간의 선악 구조의 틀에서 해석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구약의 그 이스라엘 백성은 전부 감옥을 가야 됩니다. 어린아이들까지 그냥 학살을 하고 라합같은 사람은 나라도 팔아먹고 다말은 시아버지하고 통간을 하고, 이거 다 감옥 가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간들의 도덕과 윤리의 틀 안에서 선악을 규정한다면 그건 다 감옥 갈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는 단 하나,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맘대로 살겠다고 나설 때 그걸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게 죄란 말입니다. 아무튼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선악과를 먹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면서 용서의 근거로 제시한 게 '꺾으신 뼈' 입니다. 예수님의 뼈는 분명히 안 꺾여졌는데 다윗이 꺾으신 뼈로 내가 즐겁게 해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8절을 보면
"깨끗하게 해 주세요. 정결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방법까지 묘사를 하는데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입니다. 분명, 오늘 본문과 출애굽기, 민수기의 내용으로 봐선 다윗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뼈는 꺾이면 안 되는데 다윗은 예수님의 뼈가 꺾이셨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될 수 있고 그분만이 유일한 제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납 되어질 수 있는 제물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의인은 그분 딱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분의 뼈는 꺾이면 안 되기에 안 꺾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죄가 되셔서 완전한 죽음으로 들어가셔야 됩니다. 뼈를 꺾는다는 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완전한 죽음의 확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완전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나는 것을 다윗이 안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꺾으신 뼈로 나를 즐겁게 하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뼈가 십자가 위에서 꺾이지 않으면 그분이 의인이라는 증거고 그러나 그분이 완전히 죽었다라는 건 우리의 뼈가 꺾여야 할 그 자리에서 그분이 꺾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꺾으신 뼈로 나를 즐겁게 하소서'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면 차근차근 반복해서 읽어보시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옆구리가 찔린 사건에 관해서 살펴보면, 왜 예수님의 옆구리만 창에 찔려야 되는지 그것도 역시 구약에 예언이 되어있는 사건 이었습니다.

스가랴서 12장 10절을 보면,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바로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예수님의 옆구리가 군병들의 창에 찔린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예수님의 찔림을 바라보고 애통하게 되는 그런 자들은 무얼 바라보게 된다고 합니까?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라 창에 찔린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이 찌른 자, 예수를 바라보게 되고 그렇게 찔려 돌아가신 분을 위해 애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가랴서 12장 10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이 독자를 잃어버린 애통이요. 장자를 잃어버린 애통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맞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내가 예수님을 찌른 자라는 것을 직시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애통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정도는 내 맏아들이 죽었을 때처럼 애통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맏아들이 아직 안 죽어봐서 모르지만 그게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지 추측해 보면 가히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예수를 찌른 죄인이라는 것이 그 정도로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는 지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 정도로 아픈 상태로 내가 내 죄를 점점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되는 그 과정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애통을 하는 자들을 복 있는 자라고 선언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을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애통하다'는 '울부짖다, 통곡하다' 란 뜻입니다. 자기 자식이 죽었을 때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내 자식이냐고 울부르짖을 때 쓰는 단어가 여기에 쓰인 '애통'이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 찔린 모습을 보고 애통한다라는 건 "이 세상에 진짜 죄인은 난데 왜 예수가 죽어야 됩니까?"라는 인식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인식되어 고백하는 게 잘 되십니까? 그게 잘 안되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해 가는 걸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성도는 뭔가 업그레이드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개발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아가는 그 자리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은 우리가 읽는 게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우리가 해석해서 지키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해석하여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서 우리를 죄인으로 계속 해석하여 우리 마음속에 심어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그것은 교만으로 쌓이게 되지만 성경이 우리를 읽을 때 우리는 회개하게 되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애통하게 된다는 것은 먼저 우리의 죄에 대한 올바른 자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죄가 되셔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애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애통은 '왜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내가 안 죽고 예수가 죽었는가'에 대한 애통이란 말입니다. 그런 애통한 마음이 자꾸 들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지도하실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구원의 은혜로 죄가 무엇인지를 더 처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금방 성자가 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져야 맞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1~25절에 보면 사도바울의 애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데 뭐가 감사하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대로 놔뒀으면 죽었을 건데 이런 상태인 나를 하나님이 건져주셨으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고쳐졌다는 게 아니라 나는 계속 그 상태로 드러나게 되는데 하나님이 그분의 의로, 당신이 마련하신 의로 건져 주셨다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탄하다가 갑자기 '감사하리로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후에도 자신이 예수를 찌른 자라는 것을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폭로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복음이 이해되어지자 그 애통이 감사로 바뀌더라는 겁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감정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정적 동요와 분위기에 의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죄에 대해 애통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애통함은 나의 죄로 인해서 의인이신 예수님이 죽으셨음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반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애통함이 있는 성도는 예수님의 희생에서 긍휼과 자비하심, 은혜를 보게 되고 거기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과 감사와 기쁨은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면 신앙에 열심이 생겨서 교회 일에 착한 일에 더욱 부지런해지기 전에 일차적으로 내가 찌른 분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스가랴서 12장 10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군병에 의해 옆구리를 찔린 것은 너희들이 찔렀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서의 그 내용을 십자가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시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게 하심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죄인된 자를 위해 보내신 의인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가 의인을 찌른 자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은총을 받고 간구하는 심령을 받은 성도라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기 이전에 자신의 죄인 됨을 직시하면서 애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애통과 함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먼저 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값없이 건져주신 십자가 복음 안에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료해 놓으신,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의 현장으로 우리를 지금 끌고 가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현상과 사건 속에서도 우리는 휘둘리면 안 됩니다. 잘 된다고 교만해도 안되고 안됐다고 슬퍼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분이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계신 분입니다. 모든 것이 끝이 난 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는 세계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슬퍼할 일에 슬퍼할 이유가 없고, 염려할 일에 염려할 이유가 없는 세계 속에 새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 속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에 의해 부어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 왜 상황과 사건들에 휘둘리겠습니까. 그럼에도 오늘날의 성도라는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이 죽은 거처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염려, 똑같은 행복추구, 똑같은 슬픔, 똑같은 안전, 이런 걸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에 견줄 인간의 봉사나 충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건 우리의 충성스러운 행위까지 예수님의 공로 앞에서는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한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고 없는 게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예수님을 죽고 없는 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예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분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낙심하는 일이 생기면 그냥 그 낙심이 자신에게 확 덮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주어진 상황이 참된 현실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희망을 이루는 이 현실, 이 희망은 언젠가 완료된 소망이 쭉 내려와서 확 덮쳐지게 됐을 때 더럽고 왜곡된 것을 싹 뺏겨내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인간처럼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봤을 땐 알아봤고 어떻게 봤을 땐 못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에 옆구리에 흉터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천국에서도 그걸 그대로 갖고 산다는 게 아니라 연속성이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것이 덮쳐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틀을 덮쳤을 때는 인간 세상에서 우리가 덕지덕지 붙여놓은 흠과 티가 싹 해체가 되어 녹아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앵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 사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온전한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온 것이지 우리가 무언가 업적과 공로를 보태어서 구원을 성취하는 게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은혜의 현실을 말씀과 삶을 통해서 절절하게 경험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강도의 다리가 꺾여졌다는 것, 뼈가 꺾여졌다는 내용이 굳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 구원받은 강도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 땅에서 그렇게 죽음의 확인, 뼈가 꺾이는 고통을 경험하며 왜 예수가 너희들을 위해 뼈가 꺾여야 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