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가인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기 4장 9절)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습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 땅의 가인들이 얼마나 뻔뻔스러우며, 자신들의 죄에 대해 둔감한지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가인은 금방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가 때려죽여 놓고 ‘내가 알지 못합니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보태서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도 뻔뻔스럽게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고의적 살인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인에게 가차 없이 그의 죄를 지적하시고 그를 심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했느냐? 네 동생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나에게 호소하고 있다” (창4:10)
10절의 ‘핏소리’에 쓰인 ‘피’라는 단어는 복수인 ‘피들’입니다. 왜 아벨의 피 소리를 복수로 썼을까요? 땅속에서 호소하는 아벨의 피는 이제 아벨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나 고의적 살인자들인 가인들에게 맞아 죽게 될 수많은 아벨들의 피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피들이 무엇을 호소하겠습니까? 아벨들의 피는 가인들의 죄를 하나님께 폭로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맞아 죽은 수많은 아벨들이 있기에 이 땅의 가인들은 하나님께 처벌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들에게 맞아 죽는 우리 성도들은 선으로 악을 악답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6:9~10)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맞아 죽은 수많은 아벨이 하늘의 참 제단 앞에서 가인들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한다는 구절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의 구절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이제는 땅에서 저주받고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리자, 가인은 즉각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하나님의 벌이 너무 중합니다.’ 그 말은 ‘겨우 사람 하나 죽였는데 왜 나에게 그렇게 큰 벌을 내리십니까?’라고 대드는 것입니다. 고의적 살인자들은 자기들의 세 치 혀로 혹은 행동으로 수많은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 살인자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큰 죄를 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기 때문에 피를 흘리며 죽음까지도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여전히 희희낙락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가인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어떤 사람 하나 때문에 그 사람 주변의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늘 외톨이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맞아 죽고 있는 아벨들을 욕합니다. 바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자들의 조상이 가인입니다. 그들이 바로 형제를 죽여 놓고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하는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참으로 불쌍한 고의적 살인자들입니다.
가인은 뻔뻔스럽게도 자기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께 자기를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니 어떤 방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이 표는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고의적 살인자, 즉 가인들에게 찍히는 사망의 표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고전15:22)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는 ‘죽은 자들’이라는 저주의 표가 주어집니다.
“또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계13:16~17)
바로 이 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의 표를 하나님의 백성들은 받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품에 안고 당신께서 직접 그 저주의 표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그 저주의 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안에서 받았기에 우리는 그 저주의 표가 상징하는 사망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따로 찍어 주시는 다른 표를 받았습니다.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계14:1)
성도들은 어린양의 이름이 적힌 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표를 받고 동일하게 사망으로 떨어져야 할 성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표로 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아들들로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저주의 표를 면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한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세상 속에서 보호하시는 방법으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은 가인과 세상을 한 편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서로 죽일 필요가 없는 한 편’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