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이삭은 이미 브엘라해로이에서 떠나서, 남쪽 네겝 지역에 가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이삭이 산책을 하려고 들로 나갔다가, 고개를 들고 보니, 낙타 행렬이 한 떼 오고 있었다. 리브가는 고개를 들어서 이삭을 보고, 낙타에서 내려서,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었다. ‘저 들판에서 우리를 맞으러 오는 저 남자가 누굽니까?’ 그 종이 대답하였다.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너울을 꺼내서, 얼굴을 가렸다. 그 종이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이삭에게 다 말하였다. 이삭은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었으며, 이삭은 그를 사랑하였다. 이삭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위로를 받았다.” (창24:62~67)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삼대에 걸친 세 사람이지만 그들을 따로 존재하는 세 사람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들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한 인격을 세 측면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우리 성도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람이고,(소명, 중생, 신앙) 이삭은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거저 물려받아 누리는 은혜의 측면에서의 성도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람이며,(영화) 야곱은 성도가 자신의 행위나 노력이나 육신적 특성에 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부르심과 목적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다루시는 손길에 의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변화되는 특성을 보여주는 사람인 것입니다.(성화, 견인)
우리는 그 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성도들의 영적 신분과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신앙생활의 본질 및 구원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모두 합쳐보면 성도의 구원의 내적 외적 내용, 다른 말로 성도의 이 땅에서의 현실과 영적인 현실의 이중적 국면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중 이삭이 보여주는 면은 ‘은혜’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게 되는 성도의 영적 본질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삶은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칭의의 구원에 대한 알기 쉬운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 누리는 그런 사람으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이삭은 탄생부터 결혼,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개척하여 무엇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몇 번의 경계와 배척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삭은 그렇게 은혜로 말미암은 복된 후사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상속자로서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한 것입니다. 구원의 영적 측면은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고 하나님에 의해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누리기만 할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는 인간의 교만이 내어놓은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앞에서 완전히 두 손, 두 팔을 다 펴고 온전히 자신을 부인하며 항복하여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당신이 맺으시는 열매를 맺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연합의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노력하여 우리가 열매 맺는 그런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게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문도 없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즉각 버리시고 당신의 방문에 의해 불가능함 속에서 태어나는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이삭은 그렇게 인간의 무능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탄생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바로 그러한 구원의 영적 측면을 보여주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은혜로 태어나고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삭이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푼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젖을 뗄 나이의 이삭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해 주었기에 아버지가 큰 잔치를 베푼 것일까요?
그냥 아들이기에 큰 잔치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은혜 아래에서 자라났습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그렇게 은혜로 태어나 은혜 안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의 은혜로 혼인하여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습니다. 이삭의 삶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입니다.
성경에 이삭이 특별히 부지런한 사람이거나 야곱처럼 성취욕이 강했다거나 집요한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이삭이 은혜의 사람이었음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삭은 그렇게 아버지의 기업을 무상으로 상속받았고 그 자신이 아버지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이삭의 이야기에 그려져 있는 은혜의 복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아버지의 계획) 그 안에서 기업(상속자, 상속 물)이 되었으니” (엡1:11)
우리는 요람에 누워서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은 은혜로부터 시작하여 은혜로 종결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칭의의 구원은 반드시 순종이라는 성화의 단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삭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경험한 이삭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탄생부터 자라남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것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을 하신 하나님과 자기를 죽이기 위해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도록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 오직 은혜로만 나를 키워주신 나의 아버지가 나를 제물로 드리려 할 때에는 무슨 계획이 있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믿음과 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번제단에서 순종의 제물로 기꺼이 자신의 몸을 드렸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자신에게 부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지하고 자각하게 될 때 그에게는 믿음이 생깁니다. 나의 상황과 처지가 어떠할지라도 어차피 은혜의 왕 노릇(롬5:21)에 의해 이끌려가는 인생이라면 절망하거나 좌절할 수 없다는 믿음이 은혜의 감지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 은혜의 아버지가 나를 이끌고 가시는 길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 어느 것도 나에게 해 될 것이 없다는 순종과 신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는 순종을 낳고 순종은 더 깊은 은혜를 낳으며 그 깊은 은혜는 더 깊은 순종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삭의 삶이 보여주는 성도의 신분과 구원의 본질에 대해 올바로 이해를 하게 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삶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진 아버지의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고 또 배워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에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부지런히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만 우리는 깊은 순종의 자녀로 성숙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단하고 외로웠던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선택과 인도하심을 배웠다면 아무 일도 한 것 없이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유업을 거저 상속받아 누리는 이삭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풍성하게 자라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상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역사할 때 그 은혜는 반드시 상실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마치 불이 더러운 찌끼를 걸러내듯이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하여 죄인들이 그들 자신 속에 쌓아놓은 더러운 것들과 이 세상의 힘들이 처리되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상실과 손해를 수반합니다. 그래서 영화로 향하는 성화의 과정은 고단하고 힘이 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자신을 가리켜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라고 한 것과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나그네 인생길이라 칭한 것처럼 고단하고 외롭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것이 유익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성도는 그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삭의 순종이 나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삶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은 자꾸 상실해 가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실해 가다가 결국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고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로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면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의 특징은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기 위해 세상과 이전 것들을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그 익숙한 모든 것들을 두고 생면부지의 땅으로 이사를 가 장막에 거하며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야곱 역시 하나님과 그 약속을 누리기 위해 자기를 잃어야 했으며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려야만 했습니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결국에는 나그네 인생길 130년에 그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죽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삶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야곱이 나중에 알거지가 되어 애굽으로 이주합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잃고 조카를 잃고 아내를 잃고 결국 손바닥만 한 무덤 속에서 그의 생을 끝마칩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성도가 이 첫 창조의 영역에 속한 역사와 공간 속에서 통과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에 비해 이삭의 특징은 얻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을 통과한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당도하여 얻게 되는 놀라운 복이 이삭의 삶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삭에 대해서는 죽음의 이야기나 상실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는 오직 얻는 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자였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종국의 삶이며 현재에도 문득문득 경험하게 되는 이 땅에 침투해 들어온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무언가를 상실하고 잃는 것은 사실은 찬란한 하늘의 것을 얻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 국면을 모두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상실, 즉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목적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찰나의 삶 속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십자가의 삶을 감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상실도 따르며 자기부인의 과정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 누리는 것, 즉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누림에 있어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세상과 우리 자신이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십자가, 즉 상실과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아가 하나님에 의해 다루심을 받은 후에 이삭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실과 자기부인의 과정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이며 그것을 통과하여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완성된 성도의 모습을 예표 하는 것이 이삭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는 반드시 먼저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을 받고 믿음을 발휘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과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야곱처럼 다루심을 받아서 부서질 것들은 다 부서지고 버려야 할 것들은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체험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삭의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그 삶을 문득문득 맛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이 있음도 잊지 마시고 열심히 그 삶을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