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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2편 - 주께서 행하신 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7.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함이 좋으니이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라.”(시편 92:1~2,4,12~13)

우리는 너무 쉽게
“바쁘다”는 말을 입에 올립니다. 바쁘다는 말 속에는 늘 같은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 멈추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쉼은 사치가 되고, 안식은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누릴 선택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시편 92편은 처음부터 우리를 다른 자리로 초대합니다. 이 시는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입니다. 안식일의 노래란,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쉬는 노래가 아닙니다. 존재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노래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여섯 날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던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쉬셨습니다. 그 쉼은 세상이 하나님의 뜻 안에 놓여 있음을 선언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나는 내가 만든 세상에 속해 있다”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고백을 잃어버렸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단순히 선악과 하나를 먹게 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끊어내고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으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불평과 불안, 비교와 경쟁이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안식은 깨어졌고, 인간은 쉼을 잃은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명령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루 쉬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는 누구로 인해 존재하는가를 잊지 말라”는 부르심입니다.

안식일은 또 하나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벽돌을 만들며 쉬지 못하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이끌어 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안식일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는 분명한 메시지였습니다.
"이제 너희는 너희 노동으로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노동을 멈추는 날이 아니라 자랑을 멈추는 날입니다. 내가 이룬 것, 내가 쌓아 올린 것, 내가 증명한 것을 내려놓고
“주께서 행하신 일”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기뻐진 이유입니다. 시편 기자의 기쁨은 형편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황이 풀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 자체가 그의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자주 흔들립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시키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삶이 넉넉하면 하나님이 인자하신 것 같고, 삶이 고단하면 하나님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언제나 조건부가 됩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다르게 말합니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고,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노래한다고 합니다. 아침과 밤은 하루 전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형편과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 위에 놓여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것에 둔감할까? 시편은 그것을
“어리석음” “무지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태도, 손에 쥘 수 있는 것만 확실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지만, 그것이 눈에 띄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성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뒤처진다고 느끼는 자신을 초라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시편은 분명히 말합니다. 악인의 번성은 풀과 같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성해 보여도 결국은 사라집니다. 번성 자체가 생명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 역시 그 악인 가운데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고, 멸망을 향해 가던 존재였습니다. 번성하든 빈곤하든, 결국은 동일한 결말을 향해 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를 여호와의 집에 심으셨습니다. 죄의 자리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뜰에 옮기셨습니다. 이것이 주의 인자요, 주의 성실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번성은 다릅니다. 의인은 풀처럼 자라지 않습니다. 종려나무와 백향목처럼 자랍니다. 느리지만 깊고,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가 여호와의 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삶을 다르게 살아갑니다. 형편이 신앙을 규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고난이 와도 존재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신뢰하는 상태입니다. 내 삶의 의미와 방향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찬송도 동일해야 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내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입니다. 성도의 일은 많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미 행하신 그 일을 삶 속에서 발견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이고, 그것이 자유이며, 그것이 오늘을 사는 신앙인의 참된 번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