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9-10)
타락의 결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세 번째 것이 ‘심리적 파탄’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에게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의뢰할 때 그들에게 두려움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신 분과 동행하며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자 곧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이제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함께 배신한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심겼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세상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다른 말은 ‘불안’입니다. 모든 인간은 까닭 모를 두려움과 불안에 떱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전쟁하는 것도 두려움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자원이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다른 이들의 자원을 빼앗는 행위로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약관의 나이에 왕이 되어 세계를 정복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죽은 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평생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싸웠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전쟁을 선택했고 전쟁의 열정 속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죽음이라는 무기를 들고 있는 어떤 절대자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이 중심이어야 하는데 자신보다 더 나은 면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의 모든 추한 인간들의 행위는 모두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 속에 필연적으로 자리 잡게 되는 두려움에서 발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들의 위선적인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통 두려움에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평안’을 소유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19-21)
설사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중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해 우리가 당면한 사건들과 상황들로 어리둥절할 수도 있지만, 그 어떤 상황이나 사건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만물의 주관자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바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품을 떠나 평안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절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한 사람들은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폄하해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그래서 성경은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