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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의 결과-지적 능력의 파탄

by HappyPeople IN JESUS 2024. 3. 5.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한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이미지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세기 3장 7절)

 

인간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것이 영적인 파탄이라면 두 번째 것은 ‘지적 능력의 파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7절을 보면 인간이 타락하자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졌고 그들의 상태에 대해 지각하고 판단하여 그 판단에 따라 치마를 해 입는 행동을 했습니다.

 

인간은 이제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라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은 욕망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듭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아담이 육신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자기들의 벗은 것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어야만 했습니까? 이제 본질과 자기 사유가 분리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남보다 잘나고 싶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자신들의 상황이나 여건이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나 가시적으로나 전혀 변한 것이 없는데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는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제 눈이 밝아져 스스로 선악을 판별하게 된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들의 기준이 생겨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들의 목표는 자기 욕심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은 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지적 능력의 파탄을 맞게 된 인간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은 그들의 인생 전부를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구, 권력자가 되고 싶은 욕망,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명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들은 따지고 보면 전부 타락한 인간들의 자기 부끄러움 가리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타락한 아담들은 동산 나무 뒤에서 열심히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 잎은 집단적으로는 인간들이 역사 속에 쌓아놓은 여러 가지 지식체계들로도 나타납니다.

 

인간 측에서 내어놓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시적인 무화과나무 잎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부끄러움은 하나님께서 가려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오직 은혜 아래에서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으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창세기 3장의 언어를 빌어다 표현한 것입니다.

 

“그 짠 것으로는 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사59:6)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하는 모든 시도는 다 죄악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의 결과 어그러진 인간의 지식은 자신들을 부끄러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그들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부끄러움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져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당신의 죽음으로 가려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상 것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노력과 시간과 힘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데에 쓰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것이 더 이상 나에게 자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이 나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저 없이 내 이웃의 가난과 아픔을 달래는 데에 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이 더 이상 나만의 자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재능으로 자신을 뽐내는 데에 쓰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는 데에 씁니다. 가난한 것이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애써 그 가난을 감추려 하거나 모면하려 편법을 쓰지 않습니다. 병든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