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20:19~23)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은 20절에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제자들에 평강을 기원하시면서 그 평강의 근거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는 것이 내가 비는 평강의 근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어떻게 평강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보내진 분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장 1절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 독생자에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말씀으로 보내셨다라는건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육신이 되어 내려와서 그 하나님의 뜻을 담고 그 뜻을 성취하는 자로 살았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다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는게 예수님이 말씀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땅에 내려와서 무엇을 했냐하면, 창조를 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예수님께서 태초에도 뭐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뭘 하셨냐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조금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나는 그 옆에 있었다, 조금 있다가 내가 창조했다, 내가 창조자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존재양식입니다. 나는 비워지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아들아 니가 했다라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아들에게서 비롯되고 아들로부터 말미암고 아들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이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어떤 기특한 일을 내어 놓는건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 절실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창조사역을 완료 시키기 위함인 것인데, 에수님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제자들을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내려오신건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일을 도우러 온게 아니라 자기를 완전히 다 비워 하나님이 일을 하시게 한 것입니다.
그것처럼 내가 너희를 보내니까, 너희들 평강해라, 그 말은 너희들은 어떤 것도 할 수 있는게 없으니, 내가 너희에게 들어가야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평강하니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근거로 아버지가 나를 보낸것 처럼 내가 너희를 보낸다를 근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자꾸 우리 안에서 보여주시고 들어내시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을 부려서 때로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게 사실은 우리가 하는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신 후에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과 똑같은 장면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지금 예수님이 바로 이 장면을 제자들 앞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하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존재양식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에 뜻을 자신속에 담아서 그 대상에 뜻을 이루는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존재방식이란 말입니다.
그랬더니 "다 이루었다." 즉 평강이 성취가 된 그 모습을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 쉬는 모습으로 간단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기 전에 그건 죽은 흙이였습니다. 너희들은 지금도 죽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한 걸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면 너희들은 절대 산자가 될 수 없다라는 뜻으로 에수님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측에서 완료하시는게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 즉 하나님 백성들의 새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져 완료가 된다는 구속의 현실을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는 장면에서 보여주시고 그들을 똑같은 새창조에 동역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새창조에 동역자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일차적으로 어떤 새창조에 투입이 되는 것일까요?
이제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마구 새창조에 현장으로 끌어 드려야 되나요? 일차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으로 투입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 세상의 축약이 '나 자신'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으로 예수님에 의해 보내집니다. 그런데 우리를 보내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새창조를 완성하십니다.
우리가 하는게 아니라 그때에 우리 마음에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그렇게 우리에게 보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안으로 우리가 보내진다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우리가 뭐가 잘난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렇게 구원했습니다'라는 은혜의 현실을 몸으로 입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걸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받는거고 안받아들이는 자는 심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에 "너희들이 죄를 사하면 사해지고 놔두면 그냥 놓여지게 된다" 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의미는 심판은 이미 완료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창세전에 택함받은 어떤 존재들을 구별해 내시는데 그걸 믿고 따라오는 자들은 창세전에 선택을 받은 자들로써 그들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볼때에는 우리가 전도를 했으니까, 마치 그들의 죄사함에 기여하는 자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우리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평강하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쉬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로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구하면서 천천히 내용을 묵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이야기했는지, 또 숨을 내쉬었는지 그리고 너희들이 가서 죄를 사하는 자는 죄가 사해질거고 죄를 그대로 두는 자는 죄가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왜 몰래 벽을 뚫고 들어오셨는지, 구원이라는건, 평강이라는건, 새하늘과 새땅과 새로운 피조물의 완료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이루어진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부터 23절까지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신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평강은 단순한 인사나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이는 존재의 본질을 흔드는 하나님의 은혜 선언이며, 새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2장 7절,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창조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새 창조의 선언입니다. 죽은 흙이 생기를 받아 생명이 되었듯, 두려움에 갇힌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구원의 완성과 더불어 성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설정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예수님이 하신 일, 그리고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 일은 모두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진정한 평강은 성령으로 인한 새 생명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심으로 제자들 안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이 호흡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서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평강"은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으로 먼저 보내짐 받은 자들입니다. 내 속의 죽은 흙, 나의 죄성과 무능함을 예수님의 숨결로 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새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먼저 새로워지고 살아나야, 세상 속으로도 그 생명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두는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용서하거나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미 선택된 자요, 그 말씀을 거부하는 자는 스스로 심판을 확인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도 여전히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할 때도, 사역을 감당할 때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평강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곧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으십시오. 그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의 숨결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안식입니다. 그 평강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받아 세상 속으로 파송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먼저 우리 자신을 향한 파송입니다.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능력을 바라보며, 날마다 그분의 숨결에 순복합시다. 그때 우리의 입술은 복음을 증거할 것이고, 우리의 삶은 은혜를 입증할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