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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4.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한 20:19~23)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또 여러 사람에게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렇게 숨어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이날이라고 시작이 됩니다. 이날은 지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이란 뜻입니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때는 이미 마리아와 여자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 모두에게 전해진 후입니다. 뿐만 아니라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황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 만난 이야기를 전한 이후입니다.

그들이 지금 다 모여있는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본 시몬도 이야기를 하고,예수님을 본 이들이 지금 계속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이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주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것을 믿고 우리 안에 함께 계신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문을 걸어 잠근 그들의 은신처로 그림자처럼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게 부활된 몸의 특징입니다. 그리고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인사를 하십니다.  

지금 이 그림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땅 안에 갇혀서 빗장을 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나님에 백성들의 처소로 하나님께서 직접 뚫고 들어오셔서 그들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강의 상태로 만드는 구속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문을 열어줘서 들어오신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뚫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불가항력적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의 인생에 평강을 심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된 자들이 빗장을 걸어놓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때에 홀연히 그들의 두려움을 뚫고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고 인간의 두려움의 멸망과 인간의 사망에 대한 멸망을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의 멸망과 사망의 멸망을 평강이라고 하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이 편안해지는 것을 평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강은 우리가 처해지게 될 그 종국의 사망이 하나님에 의해 멸망받았다는 것, 예수의 죽음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상태를 평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과 평강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이 주는 평강은 세상이 말하는 평화나 세상이 말하는 편안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에게 평안을 주는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란 죄와 사망의 그늘 속에서 두려워 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가항력적 은혜로 찾아오신 주님의 값없는 은혜를 의지하고 믿는것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들이 보탤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두려워 하고만 있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평강을 주시면서 사망의 멸망을 선포해 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예수님께서 두려움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시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도구치고는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우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고 우리에게 내미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뚫린 구멍은 십자가를 모형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평강의 근거는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강을 기원하면서 십자가를 내 놓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평강을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평강은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기뻐지는 걸 평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평강이라면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말을 두번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첫번째 예수님이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니까 제자들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평강을 느낀 것입니다. 그때 그렇다면 곧바로 또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데 예수님이 금방 또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와서 이제 이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왕국을 재건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추측과 기대 때문에 기뻐한 것인데 그건 평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금방 또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이야기를 하신 것은, 그들이 평강이 뭔지를 못 알아 들었기 때문입니다.

평강은 우리가 일시적으로 느끼는 편안함, 안전함이나 안락함이 아닌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사실에 의한 어떠한 완료 그 상태를 그냥 평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뚫고 들어와서 이 완료된 상태가 내 삶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라는 그것 때문에 내가 사망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평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조금 알았을때, 아예 몰랐을때,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많이 알때를 비교해 보면 우리에게 있어서 변환점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좀 성숙되어진 분도 계시겠지만 진짜 변한건 죽음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죽으면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는 그런 마음이 나를 평강속으로 이끌면서 완료되어 있는 어떤 현실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완료되어 있는 현실, 내가 그걸 이루어 가는 길이라면 우리는 절대 평강을 못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실패하기 때문에 자주 넘어지기 때문에 절대 그걸 평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이 완료해 놓으신 역사적, 객관적 사실 그것만을 붙느는 걸 평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 22~26절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평강은 우리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일차적인 목적이 평강입니다. 바울서신의 인사말 중에도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평강은 하나님이 다 이루시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안은 하나님이 완료하여 우리에게 선물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여 완료된 상태, 그 언약이 성취된 현실이 평강입니다. 그걸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이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현장에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이나 상황이 평강이 아니라 예수님이 평강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에게 평강이 뚫고 들어왔다라는건,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진행과 완료를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다라는 확고한 믿음을 붙들고 있는걸 평강을 가진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자들의 삶 속에서 진정한 성숙이 일어나고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진정한 발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문을 굳게 닫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이미 그들 사이에 퍼졌고, 몇몇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소식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의 말로는, 심지어 기적을 본 사람의 증언으로도, 인간 내면의 깊은 두려움과 죄책감을 제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닫힌 문을 뚫고 그들 한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첫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구멍 난 그 자리, 십자가의 흔적을 통해 평강의 근거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지 위로의 말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평강이라는 완성된 구원의 상태를 제자들에게 선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고, 얼마나 주도적인 은혜인지를 보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문을 열어 드린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닫힌 마음, 두려움과 죄책감, 사망의 그림자를 뚫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자격을 갖추기 전에, 그분은 이미 우리의 상태를 알고 계셨고, 평강을 들고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인생의 미래 앞에서, 죽음 앞에서, 삶의 고난 앞에서 문을 잠그고 숨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평강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임재 안에서 오는 확고한 상태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신앙은 이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진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반드시 십자가의 흔적을 통해 오며, 부활의 생명을 통해 완성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한 감정의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된 역사적 사건이며, 하나님 자신이 선포하신 완료된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구할 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분을 맞춰주는 안락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그 놀라운 평강, 다시 말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우리 안에 심어주신 부활의 생명, 그 영원한 안식을 구하십시오.

닫힌 마음의 문이 여전히 굳게 닫혀 있지는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뚫고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문을 두드리지 못할 때에도, 주님은 자신이 흘린 피와 물의 흔적을 들고,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평강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다시 한번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 마음에 뚫고 들어오소서. 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평강을 제 안에 심어 주소서.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도 담대케 하시고,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이 믿음 위에 굳게 서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자요,
그의 삶에는 참된 성숙과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