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1:7)
“경외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르아”는 그 유래가 히브리어 “야레”입니다. “야레”는 창세기 3장 10절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로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에서 아담의 그 두려움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야레”의 뜻은, 하나님을 떠나 살수없는 자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시작된 존재만이 알 수 있는 두려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넘겨준 주체를 알고 자신과 하나로 결탁된 생명과 생명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심장과 피와 같은 관계로 하나라도 그 기능을 상실하거나 멈추게 되면, 오게 되는 그 사망의 상태로 인한 존재의 상실성, 그리고 생명이 없는 자로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성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어떤 존재에게 지배를 당해 그 지배자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군림과 굴종, 지배와 피지배간의 두려움, 존재와 존재간의 두려움이 아니라 그 존재 안에 하나로 내재되어 생명과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 그러므로 그 존재가 떠나면 그게 정말 죽는 거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경외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합니다. “지식”이란 윤리적, 도덕적, 학문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아트”는 “경험에 의해서 알게되다” 라는 뜻으로 실제적 경험, 인식적 앎이 아닌 어떤 관계에 의해 형성된 절대적 앎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앎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 “미리 아신 자들”(롬8:29)로서의 그 앎으로 시작되고 그리고 그 시작된 앎을 우리가 “믿음”으로 알게되어 형성되는 관계를 “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될지를 아는 어떤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상태가 바로 지식의 근본이다, 시작이다, 성전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앎의 관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성경적 ,학문적 지식을 열심히 쌓아올려 지식적으로 동의되어 그 진리를 안다고 하는 건 그 생명과 생명의 하나됨, 연합이 아닌 그저 상대적 개념의 앎입니다.
그 상대적 개념의 앎, 지식은 자신의 가치를 드높여 그 가치를 자랑하는 것으로 그 자랑됨은 그리스도와 나를 하나로 보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보아 그 진리인 예수를 내 밖의 어떤 존재로 알고 자신의 행위로 '그 예수를 섬겨보겠다, 구원받아보겠다'라는 자아실현의 의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앎은 "나" 라는 생명없는 무가치하고 티끌, 먼지인 존재를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로 넘겨주셔서 우리를 그 진리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내 진짜 생명이 여기 있네요. 그 생명 없으면 난 죽은 자네요” 를 알고 그 생명이 없으면 살수없는 존재로서 그 존재가 없으면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게되는 앎, 그것을 경외함, 하나님을 아는 근본,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바벨탑을 지속적 쌓아올립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게 진짜 생명인줄 알고. 그래서 그렇게 지식쌓기, 행위쌓기에 열을 올리며 열심인 것입니다. 그 가짜가 진짜인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 가짜가 자신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을 가려줄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자신의 죄가 드러나자 열매없는, 그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 죄를 감추려는 했던 율법적 어리석음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하지만 성도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홍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이겨보겠다고 쌓아올린 탑을 무너뜨리고 흩어지게 하시고, 그리고 흩어진 말을 그 진리로 하나로 모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하나로 그리고 그는 우리로 그렇게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은혜요, 사랑이며 그 십자가안에서 연합된 하나님을 아는 경외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명에서 비롯된 참된 모든 앎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의 시작, 곧 근본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연결된 가장 깊은 영적 현실을 말해주는 선언입니다.
“경외하다”라는 말은 종종 막연한 ‘두려움’으로 이해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경외’는 단순한 공포나 억압적 두려움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단어 “야레(יָרֵא)”는 창세기 3장 10절, 아담이 범죄 후 하나님 앞에 숨으며 말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아담의 그 두려움은, 단지 범죄로 인한 죄책감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떠난 존재가 느끼는 존재론적 공허였습니다.
경외는 군주 앞에 선 신하의 강제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이는 존재 깊은 곳에서,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되는 생명의 절박한 외침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될 때 오는 죽음, 공허, 무가치함을 아는 자만이 그분을 경외합니다. 이는 곧, 나라는 존재가 내 힘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두려움이며, 동시에 감사와 경탄입니다. 그러므로 경외함은 하나님과 분리되었을 때의 존재 상실을 아는 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지켜야 할 규칙의 관리자’, ‘도덕적 기준의 절대자’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런 윤리적 구속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났을 때 생명이 끊긴다는 깊은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 자체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의 탄식이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생명의 본능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지식, 곧 히브리어 “다아트”는 단순한 정보나 학문적 데이터가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에서 비롯된 실제적 앎, 곧 관계로부터 시작된 존재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은 창세 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롬 8:29)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먼저 아셨기 때문에 우리가 알게 되는 ‘선행된 사랑’ 안에서 주어지는 앎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생명적 연합을 알고, 그 연합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앎은 더 이상 상대적 비교와 자아실현의 동기를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고,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절대의 진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지식을 축적하고 성취를 이루는 것으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려 합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듯,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학문을, 윤리를, 심지어 종교적 열심을 도구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은 하나님과의 생명적 연합이 없을 때, 진리를 외면한 헛된 쌓기일 뿐입니다.
바벨탑은 결국 무너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는 지식, 하나님 없는 생명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노력은 무화과나무 잎처럼 열매는 없고 부끄러움만을 가릴 뿐이며, 결국 드러날 죄와 허물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으려는 또 하나의 율법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향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생명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구속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적 연합이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내 진짜 생명이 여기 있었네요. 그 생명이 없으면 나는 죽은 자네요.”
이 깨달음, 이 생명 인식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대의 앎, 그 지점이 지식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는 그분 안에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도덕적 업적도, 종교적 헌신도 아닌 생명적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존재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부터 시작되는 열매인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단지 두려워하며 벌을 피하려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명적 절박함으로 그분을 붙드는 것이 경외입니다.
지식을 쌓기에 앞서, 성경의 구절을 외우기에 앞서, 어떤 사역을 감당하기에 앞서, 그분과 생명적으로 하나 됨을 확인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 경외에서 시작된 앎만이 당신을 진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열심히 무화과나무 잎을 꿰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며, 그 안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경외함으로 그분을 알되, 존재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오늘을 살아가십시오. 거기서 참된 지식이 자라나며, 그 지식은 곧 생명이요, 진리요,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