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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친히 이끄시는 전쟁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5. 2.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사사기 1:1~10)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에 들어간 뒤의 삶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는 책입니다. 물론 약속의 땅은 궁극적으로,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하게 될, 은닉되어 있는 천국의 모습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사기를 통해 성도가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천국을 살면서 어떠한 전쟁을 어떻게 치러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사사기를 읽다보면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왕 삼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진짜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다가 결국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사무엘이 바로 그러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사사기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사기는 하나님을 왕 삼아 살아야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고 사는 와중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의 삶을 어떻게 끌고 가시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그려져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깊이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 지도자가 없다는 것으로 사사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사기는, 보이는 하나님의 모형으로 나타났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사라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이끌고 가실 것인가에 관한 책인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모세도 실패를 하고 여호수아도 실패자로 죽습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그 역할을 마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얼마나 미완료적 존재이며 불가능한 존재인지까지 보여주고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어떻게 완료된 승리의 지점으로 끌고 가시는지를 사사기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후계자를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다 지파에게 전쟁을 명령하시고 시므온 지파를 따라붙게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없이 치러온 상태입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땅을 정복한 상태이고 얼마 남지 않은 잔당들만 처리하면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의 때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며 그 하나님 나라 전쟁의 내용에 대해 체험학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기의 서론 부분으로 사사기 전체의 내용이 훌륭하게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지파 중에 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사사기 서론에 등장할까요?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참 왕이 나올 지파이고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의해 저주를 모면하는 그러한 교회의 모형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 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매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창49:8~12)

다른 지파의 왕이 되어 홀을 쥐고 치리자의 지팡이를 간직한 채, 메시아가 오기까지 그 메시아의 모형으로 살게 되는 지파가 유다 지파입니다. 그리고 그 유다 지파에서 참 이스라엘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나귀를 타고 옷을 포도주에 빨며 나타나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유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사사기 1장에서의 유다 지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시므온 지파는 어떤 지파였나요?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 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49:5~7)

자신의 자존심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죄인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이 시므온 지파입니다. 그래서 시므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져 버려야 할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기업을 잉여로 받게 되어 살아나게 됩니다.

"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수19:1)

보다시피 시므온 지파는 유다 자손의 기업을 잉여로 나누어 받아 살아나는 하나님 백성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지파가 가나안과 전쟁을 하러 나가는데 시므온 지파가 함께 전쟁에 나갑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가 전쟁을 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기사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시므온이 그 전쟁에 어떤 도움을 주었다는 대목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사사기 기자는 시므온이라는 저주받을 백성들이 유다 지파에 의해 잉여의 선물을 받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라는 잉여에 의해 구원의 선물을 받는 성도의 이야기가 사사기인 것입니다. 이 사사기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언약에 이어지는 것임을 놓치면 안 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 하오리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수24:15~16,19)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아담과의 언약이 지켜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과 언약을 한 이스라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이 사사기 전체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다 쫓아내지 않으셨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삿2:16~17, 21-22)

내 말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아보려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허락하셨다는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도 똑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들의 대적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을 통하여 성도의 티끌됨을 낱낱이 드러나게 하시고 성도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의 실체를 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삿2:1~4)

마치 출애굽 때에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데리고 나왔느냐?’고 항의를 하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사기 내내 이스라엘은 티끌로 폭로를 당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이스라엘을 다시 새 창조의 창조물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사사기 전체의 내용인 것입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9:5)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에 의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도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주어지는 무상의 수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은닉되어 들어온 하나님 나라에서 치르는 전쟁은 전부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의 전쟁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전쟁의 주체이시며 승리자이심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진군을 할 때 해골을 앞장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일백 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창50:24~26)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 이었더라." (출13:18~19)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요셉의 해골을 앞세워 들어가게 되는 땅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해골을 헬라어로 바꾸면 ‘골고다’입니다. 골고다의 공로에 의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가 열심히 전쟁을 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 예루살렘은 약속의 땅의 심장입니다. 그 약속의 땅의 심장을 유다가 공격을 하여 함락을 시켜 버립니다.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삿1:8)

그런데 다윗의 시편을 보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것이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시51:18)

그러니까 이 사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사들은 전부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시오 진짜 사사이신 하나님의 모형인 것이고, 모든 전쟁들 또한 하나님이 치르는 하나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무력함이 함께 드러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 하시옵소서 하나"(삿11:27)

수많은 사사가 등장하는 사사기에 갑자기 심판하시는 이는 여호와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사사들의 이야기인 사사기는 진짜 사사(judge)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왕이 없던 시절의 혼란과 반복되는 실패를 보여줍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육신의 지도자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저자는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말로 요약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 체계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깊은 본성과 죄의 실재를 드러냅니다.

사사기의 시작은 아이러니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가 “누가 우리를 위하여 먼저 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보다 자신들의 실리를 먼저 고려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먼저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 속에는 단순한 전략이 아닌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다 지파는 장차 메시아가 나올 지파입니다. 구약 내내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지파로 묘사되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제안하는 장면입니다. 시므온은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에게 저주를 받은 지파로, 그 땅의 분깃조차 유다의 경내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므온이 유다의 초청으로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은, 복음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가 구원의 기업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교차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가나안의 일부 족속들을 남겨두시며 이스라엘의 마음을 시험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연약함과 한계를 통해 은혜의 필요성을 드러내시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이지만, 여전히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 죄의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기는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이며,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 부인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 1장에는 요셉의 해골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전체 성경의 맥락 속에서 보면 요셉의 유골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는 곧 ‘죽음’이 ‘영광의 땅’에 들어가는 사건이며, 십자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자기 부인의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전쟁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훈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 전쟁터로 부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더욱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유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두에 서 계시며, 우리는 그분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