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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누가복음

누가복음 - 돌아온 자의 믿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1. 6.

누가복음 17장 11~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것을 누리며 삽니다. 그중에는 없으면 당장 생명을 잃는 것들도 있습니다. 숨을 쉬게 하는 공기, 목을 적시는 물, 세상을 비추는 햇빛이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분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우리가 결코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이 오늘도 숨을 쉬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는 좀처럼 감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기와 햇빛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리는 것이라서, 특별한 은혜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일반적인 은혜'라 부르며 값을 낮춰 버리기도 하고, 더 특별한 은혜를 구하러 기도원을 찾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이 참된 감사가 될까요? 성도의 체면을 차리느라 하는 말일 때가 많습니다.

시편 136편 7~9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큰 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라, 해로 낮을 다스리게 하신 분께 감사하라, 달과 별로 밤을 다스리게 하신 분께 감사하라. 그리고 매 구절마다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후렴이 따라옵니다. 시인은 해와 달과 별을 보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았습니다. 참된 감사는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나 같은 자를 숨 쉬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영원합니다"라는 고백에 이릅니다. 믿음이란 내가 누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인자를 보게 하는 힘입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잊은 자리에서 나오는 감사는 형식에 그치기 쉽습니다.

이 눈으로 누가복음 17장의 장면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서실 때 문둥병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쳤습니다. "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시 문둥병자는 사람들 곁에 가까이 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고쳐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으로, 심지어 개처럼 여기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곤란한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갈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병을 앓는 처지에서도 자기와 동료 사이에 신분의 벽이 있음을 새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른 유대인 환자들과 똑같이 낫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인자하심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열 사람이 똑같이 나았는데 왜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왔을까요? 이 질문에서 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이렇게 설명합니다. 병 고치시는 능력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아홉은 예수님을 치료자로만 보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돌아온 이가 사마리아인이라는 점과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신 이유를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된다면, 성령의 역사와 상관없이 기적 체험만으로도 믿음이 생긴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병 고침의 체험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믿음에 더 유리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같은 기적을 보고도 아홉 사람은 왜 알지 못했을까요? 머리가 나빠서였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것이 곧 믿음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5장 7절에서 귀신 들린 자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귀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압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그를 예수님께 돌아가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아는 지식이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의 입에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말보다 먼저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나 같은 자를 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당신의 인자와 사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시는 아들을 처절한 고난에 넘기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그 사랑을 사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구원받을 가치도, 은혜 입을 자격도 없는 나 같은 자가 저주에서 건져져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니,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래서 성경을 감상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순간의 감동을 얻으려고 읽으면 말씀 앞에서 나의 실상은 보지 못하고, 마치 내가 예수님 곁에 가까이 선 듯한 착각만 남습니다. 성도는 말씀 앞에서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
어찌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해 주셨습니까? 너무 크고 높은 은혜에 드릴 말이 없습니다." 이 고백이 있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사마리아인이 돌아온 까닭은 병이 나은 것 자체보다, 그 나음에서 차별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있고 없음은 여기서 갈립니다. 유대인 문둥병자들은 자기 나음에서 하나님의 인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이런 은혜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예물을 드리고 몸을 보이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를 본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고,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 있는 성도는 이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해와 달을 보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다가, 설령 세상일에서 실패한다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는 차별이 없음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까닭은 만물에 담긴 하나님의 인자는 외면하고, 자기가 원하는 감사 목록만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만 바라보니 인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홉 사람이 병 나은 것만 생각하고, 평생 문둥병자로 살아야 했을 자신에게 베푸신 인자하심은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습니까? 내 목록에 없는 것을 헤아리며 불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숨 쉬는 것까지 은혜임을 아는 사마리아인처럼 하나님의 인자를 보고 있습니까? 주님은 돌아온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