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말라기 1:1~5)
개척교회를 섬기던 한 목사님이 뇌동맥 수술을 받고 누워 계셨습니다. 교인이 없어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그분은 사모님이 만든 족발을 배달하며 목회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뇌동맥이 터지기 직전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병원장이 물었다고 합니다. "보험은 들어두셨습니까?" 형편이 되지 않아 들지 못했다고 하자, 병원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 "족발을 팝니다."
그 병실에서 만난 다른 목사님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 분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는데, 사고 나기 불과 한 달 전에 보험을 모두 해약했다고 했습니다. 또 한 분은 학원 통학버스를 지입해 운전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목사님은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었는데, 중학교 3학년 아들이 시험 2주를 앞두고 친구와 장난치다 눈에 팔꿈치를 맞아 안구뼈 함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분들 앞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됐습니다." 재수 없는 사람,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그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자를 통해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경고를 전하십니다. 그런데 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시자, 백성들은 곧바로 대듭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 질문에는 오랜 실망이 쌓여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이 재건되면 이전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이 임할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만국의 보배가 몰려오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졌습니다. 감격으로 시작했던 예배는 시들해졌고, 제사장들은 눈멀고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며 하나님을 대충 대했습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이런 형편을 주시느냐는 항의, 그것이 말라기 1장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뜻밖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여기서 잠깐 야곱의 인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야곱과 에서의 생애를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든다면, 누구의 삶이 더 기구할까요? 놀랍게도 하나님께 사랑받았다는 야곱 쪽입니다.
야곱은 애초에 형만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챈 교활한 인물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걸어간 길은 순탄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내를 얻기 위해 외삼촌 집에서 14년을 종처럼 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네 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평생 갈등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던 밤에는 환도뼈가 어긋나 평생 다리를 절며 지팡이에 의지했습니다.
딸이 강간당하는 비극을 겪었고, 장남이 자신의 계모를 범하는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노년에는 흉년을 피해 낯선 땅으로 이민까지 가야 했습니다. 훗날 애굽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야곱은 스스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반면 하나님께 미움받았다는 에서는 어떻습니까? 야곱을 맞으러 나올 때 그가 거느린 사병은 사백 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러 나설 때 데려간 사병이 318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에서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미안한 마음에 보낸 선물조차 "나도 넉넉하다"며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세상의 저울로 달아보면 에서가 승자이고 야곱이 패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패자를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신명기 7장이 그 답을 줍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거나 뛰어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민족 중 가장 작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기 위해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정의가 뒤집힙니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감정, 혹은 좋은 것을 주는 행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출발점은 '선택'입니다. 자격이 있어서 택함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언약이 그 선택의 근거였습니다. 야곱을 향한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했을 때,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생애 전체는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고난의 길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는 사람으로 빚어졌습니다.
야곱이 임종을 앞두었을 때, 그는 자신의 시신을 출세한 아들 요셉이 있는 애굽에 묻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는 관습을 거슬러 손을 어긋나게 얹어 축복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야곱은 온몸으로 증거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렇다면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감정적인 증오가 아니라,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의 특징은 분명합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받은 자들도 인간적인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는 결국 그 모든 시도 끝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오는 반면, 선택받지 못한 자는 끝까지 자기의 왕국을 쌓아 올립니다.
에돔, 곧 에서의 후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자기의 힘과 능력을 신뢰했고, 하나님께 택함받은 백성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자라났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이 말씀을 전할 당시, 에돔은 이미 바벨론 갈대아 군대에 의해 거의 멸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무너진 곳을 다시 쌓겠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은 "나는 헐리라"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아무리 강해 보여도, 언약 밖에 있는 왕국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말라기는 바로 이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위로합니다. 에돔이 망한 것을 보라,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 안에 있기에 그렇게 완전히 망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겪는 고난과 경고조차,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보내시는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은 이 말라기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며,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된다고 선언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향해 "내 백성이라, 사랑한 자라" 부르시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자녀가 원한다고 다 들어주는 부모는 결코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당장은 괴로워도 자식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이라면, 부모는 때로 강권해서라도 그것을 줍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 택하신 자녀들에게 진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좋은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내어놓으신 최고의, 그리고 최종적인 사랑입니다.
족발을 배달하며 목회하던 그 목사님, 보험 하나 없이 뇌동맥 수술대에 오른 그분의 삶을 세상은 저주라 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의 생애가 증거하듯, 하나님의 사랑은 형통이 아니라 언약 안에 붙드심으로 나타납니다. 이 사랑을 마다하고 "왜 이렇게밖에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투정하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 우리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디 우리의 눈이 열려, 십자가에 나타난 그 사랑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말라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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