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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에스겔(01) -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7.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에스겔 1:1~3)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 에스겔은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포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전도 없고, 제사도 끊어진 자리, 나라의 미래는 완전히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성경은 뜻밖의 말을 전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늘은 예루살렘 성전 위에서가 아니라, 바벨론 포로지의 강가에서 열렸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서의 시작이며, 절망의 한복판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이름으로 히스기야가 있습니다. 부모는 아마 나라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강하게 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름과 정반대였습니다. 에스겔이 서른 살이 되던 해, 그는 제사장으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기는커녕, 포로 신세가 되어 이방 땅 강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라의 힘은 꺾였고, 성전은 멀리 있었으며, 하나님께 드릴 제사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은 인간의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강해 보이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장 약해진 바벨론 포로지에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는 우연도, 국제정세의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8장은 분명히 말합니다. 언약을 배반할 때 임할 저주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포로됨이었습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부족해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풍족해서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파기가 아니라, 언약의 실행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소망이 시작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을 배반하는데도 아무 징계가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폐기하셨다는 증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라는 혹독한 징계는 오히려 하나님이 여전히 언약 안에서 그들을 다루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발 강가는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던 포로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고,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탄식하던 자리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기도처를 찾기 위해 강가로 나아갔던 것처럼, 강가는 성전 없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던 장소였습니다. 에스겔 역시 그발 강가에서, 무너진 현실 앞에 앉아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에스겔 1장은 구약에서 처음으로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역사와 공간을 초월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계시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의 통치는 예루살렘에만 머무는 지역신이 아니라, 바벨론 한복판에서도 역사하시는 온 세계의 주권자이십니다. 바벨론조차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해 백성을 포로로 보내셨고, 그 포로지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에스겔서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스스로 회복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마른 뼈 환상은 회복의 가능성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철저한 절망을 선언합니다. 살아날 가능성조차 없는 상태, 무덤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바로 이스라엘의 실상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라.” 회복은 인간의 결단이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단독 사역입니다.

에스겔 36장은 이 모든 회복의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회복시키십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도, 포로지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열방 가운데서 모독당하지 않도록, 그들을 씻기시고 새 영을 부어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 회복은 외적인 귀환을 넘어,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신약에서 하늘이 열리는 장면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의 사닥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가장 비참한 도망자의 신세로 들판에서 돌베개를 하고 잠들었을 때 하늘의 사닥다리를 본 것처럼, 하늘은 언제나 인간이 바닥에 다다랐을 때 열립니다. 그러나 아무 절망에서나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때에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더 나은 삶, 더 나은 자아를 위해 전부를 걸고 살아갑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된 가정에 인생을 올인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포로임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사람은 이 세상이 영구한 도성이 아님을 압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처럼, 우리는 장차 올 도성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때로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합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울던 이스라엘처럼, 이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들은 세상 속에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ㅊ탄식합니다. 그 탄식의 자리에서, 오늘도 하나님은 하늘을 여십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게 되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임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