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린도전서 1:7~8)
사람은 흔히 스스로를 “결핍의 존재”라고 느낍니다. 외모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성품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믿음마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채우려 합니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더 성숙해야 한다고, 더 믿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문제는 이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가 신앙의 이름을 쓰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가 어느 순간부터 복음을 전하는 자리라기보다, 인간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공간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사람의 결핍을 달래주는 말이 더 많이 들리는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 자체는 매우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품도 더 좋아야 하고, 말과 행동도 더 단정해야 하며,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때 신앙은 어느새 자기 개선 프로젝트가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다시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나는 얼마나 변했는가, 나는 얼마나 나아졌는가, 나는 이전보다 더 괜찮은 성도인가를 끊임없이 점검합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 결핍을 채우려는 종교적 노력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 “저는 부족합니다”라는 고백이 됩니다. 대표 기도에서도 “부족한 저희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말이 빠지지 않습니다. 물론 겸손한 고백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 섞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반드시 메워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나오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신앙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평생 노력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완성에 이를 수 없는 존재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완전해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문제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놓고 다투었고, 어떤 은사를 가졌는지를 기준으로 서로를 평가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 받은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 가치를 높이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이 모든 모습은 믿음과 삶이 불일치된 전형적인 사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이 교회를 향해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를 향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말하다니, 이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선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책망받지 않는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행위나 성품, 신앙의 성취에서 나온 결과가 아닙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 화해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운 근거입니다.
즉, 우리의 완전함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종교적 노력과 공로를 부인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이 의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머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완전한 세계입니다. 사랑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미 완전한 나라에 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완전한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 속에서는 여전히 죄가 드러납니다. 여전히 우리는 넘어지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이미 “부족함이 없는 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신앙은 다시 자기 노력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고, 나는 더 채워야 한다고 말하며, 십자가 밖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그 경쟁과 비교의 세계에서 해방시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라는 초대입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곧 완전한 나라를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결핍을 채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충만한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시기 때문에 완전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 능력으로 자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이나 타인을 기준 삼아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신앙은 나를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금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날까지도 흔들림 없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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