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아가 4:1~6)
우리는 참된 생명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고, 더 성실하게 예배에 참석해야 하며, 더 나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렇게 ‘잘해 보려는 노력’ 위에 세워지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굳어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점점 생명에서 멀어지고, 종교적 부담만 커져 갑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인간의 결심이나 성취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지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과의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내가 무엇을 해내겠다는 결단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랑을 너무 쉽게, 너무 얕게 안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알고는 있지만, 그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묵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앙 현실을 보면 여전히 하나님의 행하심보다 인간의 행위가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반복됩니다.
아가서 4장 1절에서 신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이 말은 여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에서 일하느라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가진 여인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특별히 돋보이는 미인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 말을 하는 이는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을 가까이 둘 수 있는 왕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말하는 ‘어여쁨’은 외적인 조건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아가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철저히 무너뜨립니다. 여인이 어여쁜 이유는 그녀가 무엇을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얼굴, 몸매, 행동, 성취가 기준이 아닙니다. 단 하나의 이유는 왕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기준이 되고, 사랑이 조건이 되어 여인은 어여쁜 존재가 됩니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어여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대답 속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시선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체와 행위, 성취와 열심을 중심으로 자신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어여쁨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아가서가 보여주는 사랑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여인은 사랑을 받기 때문에 어여쁜 존재가 됩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 어여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여인의 상태와 무관하며, 여인의 변화 여부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잘잘못을 다시 계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이 부족하다며 사랑에서 밀려날까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다면, 그 신앙은 사랑의 관계라기보다 두려움의 관계에 가깝습니다.
아가서 4장 4절에서 신랑은 여인의 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같구나.” 이 표현은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의 망대는 방패 천 개가 걸린 강력한 방어의 상징입니다. 이는 사랑 안에 있는 여인이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왕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고개를 숙이고 위축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형편이 나은 사람 앞에서, 신앙이 열심인 사람 앞에서, 삶이 안정된 사람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을 삶의 조건과 형편으로 확인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황이나 신앙의 성실함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채워야 할 부족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이미 완전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신자가 되어서 사랑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기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이 선언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빛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주 안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빛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는 권면은 스스로를 채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기뻐하며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성도는 스스로를 꾸며서 아름다워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는 신랑 되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미 어여쁜 존재로 불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주의 신부로서의 아름다움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이 말씀이 더 이상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기준이 되는 자리에서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리는 신부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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